[윤정문 선생]
보람을 찾던 旅路
책머리에
6.25의 전화(戰禍) 속에서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국민소득 60불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 당시 유일하게 학비가 면제되었던 국립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교직이란 직장이 보장되었다.
그래서 가정이 빈곤한 학생들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던 학교가 국립 사범학교였다. 당시 남녀공학(한 학년에 남학생 100명, 여학생 100명)이던 국립 부산사범학교 졸업생들은 매년 졸업과 동시에 부산 및 경남 일원에 전원 발령을 받았다. 1957년 3월 31일 첫 발령을 받은 학교가 당시 2부제 수업을 하던 24학급 규모인 고향 거제 장승포초등학교였다. 그 후 42년간 20여 곳을 직장 따라 옮겨 다녔다.
사람이 나이 들면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지나온 길이 바른 길을 걸어 왔던가, 비뚤어진 길을 걸어 왔던가, 이 사회와 내 이웃들에게 폐를 끼치지나 않았던가, 내가 몸담았던 직업이 보람 있던 일이었던가? 다행이도 나는 『공자(孔子)의 삼락(三樂)』의 하나인 제자를 가르치는 교육자의 보람에 42년간의 세월을 보냈다.
권력과 재력하고는 거리가 먼 교직이란 본시 초반에 비틀거리고 중반에 철이 들고 종반에 지고(至高)의 보람을 느끼는 속성을 가진 직업이다. 보람은 인생의 가치요, 의미 있는 일을 하였을 때 얻어지는 정신적 만족감이며 기쁨이다. 보람은 정성된 수고와 사랑의 대가로 얻어지는 땀의 산물이다. 뜻있는 목적을 추구하고 실현할 때 비로소 우리는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42년간의 교직생활을 통하여 51년 전 20대 후반, 처녀가 크면서 쌀 서 말을 못 먹고 시집 간다던 낙도(落島)인 지심도(只心島) 분교장(分敎場)에서 5년간 젊음의 정열을 낙도개발에 쏟았고 50대 초반 울산남부초등학교에서 4년 6개월간, 교장 재임 시 능력과 창의력을 최대로 쏟아『선진 학교의 모델』로 학부모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던 시기를 잊을 수 없다. 남보다 우수한 학교경영 보다는 남과 다른 방법의 학교경영을 실현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동안 경상일보와 울산매일에 게재되었던 윤정문의 칼럼 250편 중 80편과 신문에 보도되었던 관련기사(38건)와, 배우자로 인연을 맺어 인생 여정(旅程)의 동반자가 되었던 소정(素汀·車純淑)이 2007년 7월부터 70세가 넘은 나이에 울산시 남구 문수실버복지관에서 배운 한국화 작품 60점을 한데 묶어 부부 산수(傘壽·80) 기념으로 「보람을 찾던 여로(旅路)」을 발간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말기 관직을 지냈던 판서(장관급), 승지(비서실장), 참판 (판서를 보좌하던 차관급) 등이 중심이 되어 경로효친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일제 강점기에 모성공회(慕聖公會)를 조직, 전국 각지의 효자 효부 등을 발굴하여 찬양문(표창)을 내리셨는데, 어머니(김해 김씨 김일선·金日善·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서목부락)께서 20세에 시집오셔서 30세에 1927년 모성공회로부터 효부(孝婦) 찬양문(표창)을 받은 바 있어 그 효행을 후손들이 항상 가슴에 새겨두고 효의 귀감으로 삼고자 같이 수록하였다.
그동안 우리 부부가 일상을 살아오면서 도움을 받은 분들이 너무나 많다. 사회적로나 개인적으로 항상 물심양면으로 격려와 가르침을 주고 이끌어 주고 따뜻한 정을 나누었던 분들이기에 더욱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늦게나마 이 책 한 권을 드리면서 부부가 함께 고마움을 표하고자 한다. 책 발간을 위해 많은 조언과 오래된 신문 기사를 찾아주고 필요한 자료들을 미국에서 보내준 미주방송인협회 양방수(梁芳秀) 총무국장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울산 남구 문수복지관에서 10여 년간 한국화를 지도해 주신 동양화 작가 안덕수 선생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16년 9월, 울산에서 巨泉 尹正文
▲ 울산매일신문에 게재된 풀판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