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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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포(多大浦)를 구슬피 떠도는

 

임란진혼곡(壬亂鎭魂曲)

 

 

 

 

 

 

 

프롤로그

 

 

 

  자연계의 수억만을 헤아리는 종(種)들 간에는 치열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을 통해 생존과 멸종을 되풀이해 가며 힘의 균형을 유지해 왔다. 뿐만 아니라 각 종의 개체(個體)들 간에도 약한 것은 강한 것에게 먹히고 짓밟힘으로써 진화를 거듭할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결코 선악(善惡)으로 가름할 수 없는 자연계에 있어 지극히 온당(穩當)한 순리(順理)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이라 하여 예외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인간만이 지닌 무한대의 욕심으로 인해 잔혹성에 있어 그 어떤 금수(禽獸)보다 더할 것이다. 

  인류(人類)가 태동(胎動)한 이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엔 으레 사소한 알력(軋轢)부터 큰 다툼에 이르기까지 숱한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로인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역사가 지속되어 왔다. 그렇듯 나라와 나라 간에도 크고 작은 알력과 다툼이 늘 상존(尙存)하기 마련이며 나라가 강건(剛健)해지면 자연스레 주변 약소국(弱小國)들을 넘보게 되어있다.

  과거 우리 한반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 나라는 남의 나라를 정벌(征伐)하기보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중국이나 일본 등으로부터 숱한 침략을 받아오기만 했다. 대개 중국 대륙의 판도(版圖)에 따라 가장 강한 나라의 속국으로 지배를 받아왔으며, 때론 속국으로 안주해온 까닭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를 겨우 비껴갈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성향(民族性向)이 옛 로마인이나 몽골인, 독일인, 일본인 등 한 때는 세계를 제패(制覇)하려 했던 종족들에 비해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호혜적(互惠的)인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편협(偏狹)하고 이기적(利己的)이며 나약한 성향을 지닌 터라, 보다 대국적(大國的)이요 보다 거시적(巨視的)인 기질을 미처 함양(涵養)하지 못한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를 거론함에 있어 집권 세력들 간의 끊임없는 당파정쟁으로 나라가 늘 시끄러웠고 백성들은 탐관오리(貪官汚吏)들로부터 갖은 노략질을 당해온 터라 굶주림도 면치 못할 만큼 피폐했다. 따라서 국가방위(國家防衛)에 대한 인식은 자연 옅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하니 타민족의 침략과 지배로부터 어찌 자유로울 수가 있었겠으며 타민족을 정벌(征伐)하겠다는 의지를 어찌 지닐 수 있었겠는가. 

 

  ‘무력(武力)이란 사용할 때에 비로소 그 진가(眞價)가 발휘된다.’ 

  ‘강한 자는 약한 자의 것을 부단히 빼앗음으로서 보다 강한 쾌락을 추구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강한 것은 선(善)이요 약한 것은 악(惡)이다’란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며, 인류가 지난 역사를 통해 부단히 검증해보인 불변의 진리(眞理)이다. 입으로만 성덕군자(成德君子)인 척하며 도덕성을 내세워 이런 힘의 논리를 부정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다. 그것은 역사의 순리를 거부하는 것이요 나약함과 비굴함에서 오는 기만이다.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인류 역사가 언제나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어 왔듯이 현재도 그렇고 다가올 미래 또한 예외 없이 강한 힘이 늘 약한 힘을 억누르고 지배하려 할 것이다. 강한 자는 늘 약한 자의 것을 탐하려 할 것이고 강한 나라는 늘 약한 나라를 침탈하려 할 것이다. 강한 것은 그로인해 번영과 함께 희열을 맛볼 것이고 약한 것은 그로인해 쇠락과 함께 좌절을 맛볼 것이다. 따라서 강한 것은 불온한 것이 아니며 배척의 대상이 아니다. 강한 것이야말로 생존전략이며 진리이자 정의인 것이다. 

  임진왜란 또한 강한 군사력을 지닌 왜국이 허약한 조선을 정벌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전쟁이다. 왜국의 부도덕성을 탓하기 전에 무능한 조선의 임금과 당파 싸움으로 일관해온 부패한 조정 대신 그리고 백성을 갈취(喝取)해온 탐관오리들을 나무랄 일이다. 그리고 왜환(倭患)을 자초한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민족 성향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증명해 보인 것으로 그 후손된 자로서도 고개조차 들 수없는 대단한 수치이자 치욕의 역사인 것이다.

 

  동서고금을 망라하여 세상이 어지럽고 혼탁(混濁)해지거나 이웃나라의 도발이라도 있으면 어김없이 영웅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영웅의 활약상이 잘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지면 그 이름이 길이 남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려 그 존재마저 잊히는 것이다. 

  흔히들 ‘임란영웅’하면 ‘이순신’만을 떠올린다. 당연하다. 임란을 승리로 이끈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을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비록 찰나의 순간에 산화(散花)하여 후세로부터 잊힌 영웅에 불과할지라도 이순신 버금가는 영웅이 우리 다대포에도 있다. 

  임란 발발 당시 오로지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지키겠다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일념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온 왜군을 맞아 다대포진성을 지키다가 끝내 장렬하게 순사(殉死)한 영웅이 있다. 그는 임란을 통해 최초의 승전보(勝戰譜)를 우리 역사에 남긴 장수로서 우리는 반드시 그를 기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공을 높이 기려야 한다. 

  우리가 명량해전(鳴梁海戰)의 영웅 이순신 못지않게 기억하고 기려야 할 인물은 다름 아닌 다대전투(多大戰鬪)의 걸웅(傑雄) 윤흥신 공이다.

 

  윤흥신 공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유성룡(柳成龍)이 쓴 <징비록(徵毖錄)>과 신경(申炅)이 쓴 <재조번방지(再造蕃邦志)>, 구사맹(具思孟)이 쓴 <조망록(繰亡錄)> 그리고 범어사(梵魚寺)의 기록지 <국조전망인시식책자(國朝戰亡人施食冊子)> 등에 ‘윤흥신은 4월 14일에는 다대포진성을 지켰으나 4월 15일에 다시 밀려 온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라는 내용에 있어 거의 한결같고, 그나마 두서너 줄에 그칠 뿐이다.

  그리고 다대1동 소재 윤공단의 첨사윤흥신공순절비(僉使尹興信公殉節碑)란 비석에는 ‘始倭陷釜山 分兵圍多大 公力却之 軍吏進曰 賊必悉至 莫如避 公叱曰 有死而己 明日賊大集 軍遂潰 公獨終日射賊 賊城陷死之(시왜함부산 분병위다대 공력각지 군리진왈 적필실지 막여피 공질왈 유사이기 명일적대집 군수궤 공독종일사적 적성함사지)’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 비문은 조선 순조 때 이조판서에 오른 조진관(趙鎭寬)이 지은 것으로 그 비문을 직역(直譯)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 왜군은 부산성을 함락하고 군사를 나누어 다대성을 포위하였는데 공이 힘을 다해 물리쳤다. 군관이 나서서 말하기를 ‘적이 반드시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 올 것이니 피하라’하니 공이 꾸짖어 말하기를 ‘내게는 죽음만 있을 뿐이다.’ 다음날 대규모의 왜군이 집결하여 다시 전투가 시작되자 공이 혼자 종일 활을 쏘아 적을 대적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적에 의해 성이 함락되고 죽었다.”

 

  윤흥신 공이 순사한지 16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 조엄(趙嚴)과 강필리(姜必履)에 의해 그의 사적을 밝히려는 시도는 있었다. 허나 그의 과거 행적은 물론 다대포진성 전투와 관련된 자료가 전무하여 그나마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의 약전(略傳)도 현재로서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그가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화를 당한 윤임(尹任)의 아들이라는 것만 역사 기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조엄은 <윤공유사(尹公遺事)>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록으로 남겼다.

  “일찍이 <징비록>을 보니 ‘다대포진첨사 윤흥신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라고 기술하였고 또 <재조번방지>에도 ‘왜적이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西平浦)와 다대포를 함락시키니 다대포진첨사 윤흥신이 힘껏 싸우다가 피살되었다’라고 기술하였다. <징비록>은 선조 때의 상신(相臣) 유성룡이 찬술한 책이고 <재조번방지>는 동양위(東陽尉)의 맏아들인 신경이 찬술한 책이라 당시의 문헌으로 반드시 고증하였을 것이기에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임란 후 160년이 지난 1757년 정축년(丁丑年) 내가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어 부임한 그 이튿날 충렬사를 참배하였던바 충렬사에는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공과 부산포진첨사(釜山浦鎭僉使) 정발(鄭撥) 공만이 제향 될 뿐 다대포진첨사 윤흥신 공의 위패는 보이지 않았다. 같은 날 같은 부산지역에서 전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송ㆍ정 양공(兩公)만 한 묘(廟)에 향사되었으며 심지어 향리와 노비라도 전사한 자는 함께 향사되었음에도 윤공만 여기에 참여할 수 없었는지 그 까닭이 궁금했다. 이에 읍지(邑誌)를 상고하고 다대포를 찾아가서 수소문해 보았으나 오랜 세월이 흐른지라 전문(傳聞)마저 끊어졌으니 후예들도 알지 못하고 후인(後人)이 천발(薦拔)하는 일도 없으니 당시의 윤공의 의열(義烈)이 드러나지 않게 됨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1761년 신사년(辛巳年)에 내가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도내의 효열(孝烈) 및 절의(節義)를 표창하는데 윤공의 일도 그 한 가지였다. 예조에서 증직할 것을 의정부에 올리고 의정부에서 다시 상주하여 조만간 그 하회가 있을 것이나 마음속에 석연치 않은 것은 역시 윤공의 사적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근자에 문득 구사맹의 <조망록>을 얻어 보았는데 그 사절조(死節條)에 다대포진첨사 윤흥신을 특서하고 주(註)하여 말하기를 ‘왜적이 성을 포위함에 힘껏 싸워 이를 물리쳤다. 그 부하가 말하기를 내일 왜적이 크게 쳐들어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감당하기 어려우니 우선 나가 피하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니 윤흥신이 말하기를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어찌 차마 떠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튿날 적이 과연 크게 이르니 군졸이 모두 도망갔다. 홀로 종일토록 적을 쏘아 죽이다가 성이 함락됨에 이에 죽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공적을 가지고도 충렬사에 합향(合享)되지 않는다면 충혼을 무엇으로 위로하며 후세 사람을 무엇으로 권장하리오.”

  

  강필리 또한 <윤공사절기(尹公死節記)>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록으로 남겼다.

  “1764년 갑신년(甲申年) 가을에 내가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충렬비(우암 송시열이 비문작성)를 읽었으되 윤공이 실려 있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겼고 충렬사를 참배하였으되 윤공이 모셔져 있지 않음을 슬퍼하였다. 그 유적지를 찾아보았어도 이미 세월이 오래 지나 그 자취를 살필 길이 없고 지방 노인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금년 봄에 내가 금정산 범어사에 놀러나갔다가 우연히 <국조전망인시식책자>를 보니 다대포진첨사 윤공의 이름이 송ㆍ정 양공의 이름 밑에 크게 씌어 있었다. 공의 정충(貞忠)으로 유사(遺祠)에 배향(配享)되지 못하고 다만 절간의 시식을 받을 뿐이니 이 어찌 사림(士林)의 향모(向慕)하는 뜻이 산승(山僧)의 숭모함과 같지 못할꼬.

  …… 본부[東萊府]와 양진[釜山浦鎭ㆍ多大浦鎭]이 함락된 것은 같은 시기이다. 부산성은 임진 4월 14일이고 본부는 15일이다. 다대성의 함락 또한 본부와 같은 날인지 알 수는 없으나 같은 날이 아니라면 그 다음날이 분명하니 요컨대 15일이나 16일 양일을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터이다.” 

 

  윤흥신 공의 사적(史蹟)은 임란 이후 오랜 세월 역사의 소용돌이에 묻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다 160여년이 훌쩍 지난 뒤에 동래부사로 부임해 온 조엄과 강필리에 의해 비로소 발현(發顯)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1772년(임진년) 2월에 이르러서야 충렬사에 제향(祭享)을 올릴 수 있게 되었으니 실로 다대포진성이 함락되고 그가 순사한지 꼭 180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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