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로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보나마나 예수가 태어난 해를 기원으로 하는 <서력>을 사용하지 않고, <율리우스력>을 사용했을 겁니다.
로마인들은 예로부터 태음력을 사용했습니다.
열두 달 중에서, 큰 달(31일) 4번, 작은 달(29일) 7번, 윤달(28일) 1번이고, 1년은 355일이었습니다.
정월은 지금의 3월에 해당하는 마르티우스 달이었습니다.
이처럼 정확하지 못한 역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밤낮의 길이가 같은 춘분을 비롯하여 절기가 맞지 않았습니다.
수석대제관이 부족한 날짜를 계산해서 22일, 또는 23일 추가된 새 달력을 연말이나 연초에 공표했습니다.
로마인들과는 달리, 이집트인들은 1년이 365일 달력을 사용했습니다.
우기 때마다 나일 강이 범람하면서 토사가 떠 내려와 삼각주를 덮었습니다.
그 때문에 거름을 주지 않아도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었습니다. 파종 시기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게 관건이었습니다.
고대 문명을 주도했던 이집트인들은 파종 시기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달력을 만들어서 사용했습니다.
시리우스별은 70여 일 동안 보이지 않다가 강물이 범람하기 전, 태양보다 먼저 지평선 위로 올라왔다가
이내 태양에 가려 보이지 않곤 했습니다.
기원전 2500년경, 이 사실에 주목한 무명의 어느 천문학자가 시리우스별이 뜨는 시점을 첫째 날로,
1년을 365일로 짠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이 달력으로 파종 시기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류가 만든 달력 중에서 가장 지성적인 달력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서 살해당한 기원전48년,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천문학자 소시게네스로 하여금 4년마다 윤달이 들어가게 하고, 춘분을 3월23일로 고정시킨 <율리우스력>을 만들게 하고,
기원전45년을 문명시대 원년으로 새 달력을 공포했습니다.
이 때, 공화정이 시작된 기원전509년을 원년으로 하자고 말한 이가 있었습니다.
로마의 최초 도서관장이었던 마르쿠스 테렌티우스(BC116~BC27)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럽인들은 16세기까지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다가, 가톨릭교황 그레고리우스13세가 부활한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새 달력으로 바꾸라고 지시했습니다.
가톨릭이 동방과 서방교회로 나뉘고, 서방교회의 53대 교황 요한1세(470~526)가 동방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매년 바뀌는 부활절 날짜를 간단히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주교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에게 지시하면서 달력도 바꾸라고 했습니다.
엑시구스는 유대 총독 빌라도 재임 중에 예수 사건이 있었고, <율리우스력>으로는 75년이었습니다.
거기서 예수 나이 30을 뺀 <교회력>을 이미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13세는 <교회력>을 새 달력으로 공포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문명 시대 원년(BC45)이었던 <율리우스력> 1627년 10월 4일이 - <서력> 1582년 10월15일로 바뀌면서
하룻밤 사이에 45년이 사라지고, 날짜도 10월15일로 바뀌는 소동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서기30년을 <서력> 원년으로 하지 않고, 예수
출생일을 원년으로 한 것은 -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예수도 문명의 선각자였습니다.
예수의 <산상수훈은 문명 이야기> 그 자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 달력만큼은 엎어 치나 메치나 매일반이 되는 겁니다.
다음 회에서는,
어떻게 <산상수훈>이 <문명 이야기>가 되는 지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