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랑에 서서 읽다. - 강신구의 ‘서피랑’
통영 적십자사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여든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는 동네 굴까기의 달인으로 새벽부터 나가 앉은 자리에서 꼼짝을 않고 굴을 까서 달에 오백을 넘게 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손가락이 굽어진 채로 아프다, 아프다 소리를 달고 살면서도 굴까기를 접지 못하는 것을 보면 가히 그 소문이 맞다 싶더라. 할머니는 매일같이 독한 진통제나 관절염 약을 타 드셨다. 약 먹을 때는 잠깐 손가락 마디마디 뚫고 들어오는 통증을 좀 잊으신다 했다. 그렇게 할머니들을 여럿 보내고 나면 적십자 병원 뒤편을 돌아나가 서피랑에 올랐다. 늦은 오후의 햇살에 눈이 자꾸 감기는데 서피랑에 올라서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동피랑 벽화마을이 워낙 유명하여 그쪽은 들고 나는 차때문에 입구에서부터 교통체증이 장난 아니다. 중앙시장을 접해 있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에 반해서 서피랑은 언제나 고즈넉했다. 관광객이 있어도 동피랑처럼 담벼락마다 사진들을 찍고 있는 게 아니라서 더욱 조용했던 것 같다. 식후 좋아하던 산책 장소가 수필의 소재로 등장하니 제목부터 반가웠다. 통영에서의 시절이 짠 바람 냄새와 함께 훅 밀려 왔다.
피랑은 벼랑이라는 뜻의 사투리이다. 피랑을 중심으로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묻어나는 달동네가 생겼다. 철거 이야기까지 나왔다가 관광 상품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면서 오히려 피랑을 가꾸고 홍보하게 되었다. 그래선지 각 피랑들에는 동네마다의 개성이 있고 그 개성을 즐기는 맛이 있다. 피랑을 대표하는 맛집이 있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사람들이 득시글득시글 하는 동피랑 주변에는 젊은 청년들이 새로운 가게를 내거나 아이디어 상품이나 재미있는 주전부리를 파는 경우가 많다. 물고기 잡아 팔고, 말려 팔고 하던 동네에서 빨강머리 앤이 그려진 손거울을 파는 상점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통영이 아니라 서울 연남동 핫플레이스에 들어서 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서피랑은 조금 다르다. 새로운 가게라고 해봤자 작고 깔끔한 커피숍이 한두개 들어선 거 외에는 조용한 편인데, 피랑을 올라가기 전 건너편 도로에 아주 오래된 할머니 떡볶이집 하나가 그나마 제일 유명한 맛집이다. 떡볶이도 일품이지만 떡볶이 국물에 흥건히 적셔먹는 닭튀김이 별미이다. 바로 튀겨서 내주신 순살 닭튀김을 국물에 푸욱 찍어먹으면 바삭, 달달한 풍미가 입안에 가득 찬다. 순대 인심도 넉넉해서 일인분 시켜도 양이 제법 많아 분식이 아니라 배 뚜드리고 나오는 식사가 되곤 했다.
강신구의 ‘서피랑’은 통영의 아기자기한 예쁜 모습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부산에서 오랜만에 가을 문학 나들이를 나선 길에 비는 추적추적 오고, 단체 버스는 해운대에서 출발하는 바람에 부산 끝에서 끝까지 넘어와 순탄치는 않은 길이었다. 팬데믹으로 오래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의 소식을 직접 듣고, 그동안 누가 아팠다, 고생했다 손잡고 마주할 수 있는 귀한 자리에 아름다운 통영이 거들었다.
강신구가 들려주는 통영의 뒷이야기에는 토지를 쓴 박경리의 일화도 있고, 삼도수군통제영 충무 이순신의 싸움도 있다. 그곳에 토막을 쓴 유치진 작가가, 시조를 쓴 김상옥도 살고 있다. 전혁림 작가의 그림이 바다를 내려다보고, 윤이상 작곡의 노래가 밤바다에 울려퍼지는 그 곳, 문화가 살아 숨쉬는 통영.
나는 통영을 떠나온 지 벌써 5년이 흘렀지만 강신구의 여행길에 함께 따라 나서보니 바로 엊그제 다녀온 듯 생생함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가만가만 더듬어 보니 양지 바른 따뜻한 박경리 작가의 묘지에 다녀왔던 발자국 소리가, 봄이면 벚꽃이 만개해 아름다운 길을 이뤘던 봉숫골 입구에서 막걸리를 따르는 소리가, 중앙시장 졸복 지리의 맑은 국물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강신구 작가와 함께 통영 여행은 뭐 하나 입에 대지 않아도 마음이 그득그득 차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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