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꽃인 것을 부디 잊지 마세요.
-안명희의 꽃을 읽고
‘엄마, 건드리지마~’
요즘 우리 아빠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다. 엄마한테 학원에 가져가야 할 문제집을 말해놨는데 이번주까지 와야하는 문제집이 아직 어디 물류센터에 있단다. 그냥 학원 옆 서점에서 사도 되는데 굳이 인터넷으로 샀냐고 한마디 하려는데! 엄마 건드리지마~ 아빠 눈에서 레이저 뿜뿜이다.
그제 아침에는 베이글에 과일을 곁들여 먹고 싶어서 전날 저녁에 당부해놨는데 미역국에 밥을 말아 놓으셨다. 지난번엔 미역국이 짜더니 아침 미역국은 아무 맛이 안난다. 그냥 그렇다고 말을 했는데 엄마가 그러면 먹지 말라고 하고는 그릇을 엄청 세게 개수대에 담군다. 이크, 그릇 깨질 것 같다.
요즘 저녁만 되면 찬 바람에 공기가 엄청 쌀쌀한데 엄마는 거실 창문, 안방 문을 활짝, 활짝 열어 놓는다. 엄마는 덥단다. 인견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있는 엄마는 얼굴이 발그레하다.
아빠는 결국 엄마를 건드리면 안 되는 비밀을 이야기해주셨다. 요즘 엄마가 갱년기란다. 영유아기, 사춘기도 아닌, 이름도 생소한 갱년기라고 한다. 처음엔 그게 뭐야, 싶었는데 엄마도 잠도 잘 못 주무시고 뒤척이는 걸 보니 슬슬 걱정이 된다. 그러던 중 엄마 책장에서 안명희의 ‘꽃’을 만났다.
그대
시든 꽃이라고 슬퍼하지 마세요
한 때는 곱고 눈부시어
모두가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젊은 날이 있었지요
그대
열매 없는 꽃이라도 기죽지 마세요
한 때는 이곳 저곳 씨를 날리며
수많은 꽃을 피운 시절이 있었지요
그대
빛이 없는 꽃이라고 낙심하지 마세요
저녁 노을에 비췬 엷은 피부는
가끔씩 살구빛을 발하고
산뜻한 미소에 수고하고 지친 나그네
힘을 얻을테니까요
그대
아직도 꽃인 것을 부디 잊지마세요
그대를 엄마라고 바꿔 불러보면 이 시는 우리 엄마에게 들려 주기 딱 좋은 시다. 엄마는 지금 자신이 아름다운 꽃인 것을 잠시 잊고 있다. 곱고 눈부시어 모두가 바라보는 꽃은 아닐지언정 엄마는 우리집의 웃음꽃이다. 우리집을 지켜주는 수호꽃이다. 엄마가 아침에 깨워주지 않으면 학교에 갈 수 없다. ‘5분만 더’는 내 기본 장착템이지만 그 5분을 뒹굴거려서 일어나면 아침이 차려져 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차려진 아침밥을 다섯 숟갈 정도를 뜨면 적당히 배가 부르고 물을 마시고 양치질을 하고 나면 딱 학교에 나설 데드라인이다. 엄마는 퇴근하면서 학교에 들러 나를 학원에 데려다 준다. 학교랑 학원은 거리가 있어서 엄마가 데려다주지 않으면 버스를 타야한다. 버스를 타는 거나 엄마가 태워주는 거나 시간은 비슷하지만 엄마 차를 타면 엄마가 챙겨온 맛있는 간식을 먹을 수 있다. 엄마 친구분이 주셨거나 점심을 먹고 나온 후식을 안 먹고 가져오시거나 부서에서 다같이 간식을 나눠먹는데 나를 위해 한두 개 남겨 오는 식이다. 차 안에서의 이 한 입의 간식타임이 나는 너무 행복하다. 학원이 끝나면 저녁 8시다. 단어 테스트에 통과 못하고 더 남아서 나머지 공부를 해야한다. 종종 9시에 끝난다. 그 때에도 엄마가 데리러 온다. 나의 하루는 온통 엄마가 출현한다. 나에게 엄마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괴로운 마음으로 엄마는 항시 열이 나고 땀이 차는 게 아닐까.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 가족의 꽃인데 엄마는 시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미 20대 치열하고 공부하고 30대 돈을 벌면서 우리를 키웠는데, 이젠 뭘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고 하셨다. 나는 엄마가 이미 어릴 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직장을 얻고 우리를 낳고 키운 그 수많은 열매들을 이제는 그냥 자랑스러워 해도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또 엄마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으시다면 그 길이 무엇이든 열심히 응원할 것이다. 엄마가 우리를 언제나 응원해주었듯이 말이다.
엄마는 수수하고 담백한 꽃이다. 어디에나 피고 자주 볼 수 있는 들꽃이지만 보고 있노라면 그 어느 꽃보다도 마음의 위안이 되는 고요하고 깨끗한 꽃이다. 여린 꽃대에 큰 마음이 얹어져 노랗고 얇은 꽃잎이 서른너덧 쪼르르 달려 동그랗고 보드란 동그라미를 만들어 낸다. 보면 볼수록 예쁘고 정감 가는 꽃이다. 장미는 강렬한 색으로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지만 아름다움에 끌려 손을 댔다간 가시에 찔리고 만다. 민들레에게는 찔리지 않는다. 노란 꽃도 있지만 흰 꽃도 있고, 모양은 들여다 보면 꽃잎에 따라 각양각색, 질리지 않는다. 꽃씨는 가벼워 멀리 멀리 날아가 척박한 땅이나 진흙 속에서도 꽃을 피워낸다. 꼭 꽃집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꽃은 아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미소와 사랑을 전해줄 수 있다.
아침밥을 먹고 난 자리에 밤새 필사해둔 안명희의 ‘꽃’을 놓아두었다. 엄마가 꽃임을, 우리들의 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