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지 작가의 <파꽃>을 읽고
파꽃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얼마나 곤궁하게 생겼는지.
어떤 풀꽃은 아무데나 앉지 않는 귀한 집 아가씨같다.
꽃을 기다리며 기꺼이 작아져 들러리가 된 잎들, 그 위에 꽃받침이 지정석처럼 놓여야지만 비로소 치마자락 펼치며 한 자리 앉는 것이다.
파꽃은 빈약한 탑 하나에 삐뚤삐뚤 얹어놓은 공 같다.
원줄기에서 대충 갈라져나온 대에 아슬아슬 달려있다.
벗기다 남은 비닐같은 꽃받침이 보이는 둥 마는 둥, 정성껏 준비된 꽃이란 느낌도 없다.
온실 속 화초라는 말도 있는데, 파꽃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온실은 커녕 이파리마저 없는 것이다. 혈혈단신의 삶이 매워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파꽃의 밑에는 맨땅 뿐이다. 땅 가까이 층을 깔아 주는 잎이 없다.
파꽃은 가족도 집도 없는 사람같다. 나같다.
일일이 기억나지 않는 세월동안 사람들은 부모 덕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평가내리는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제일 힘겨운 말은 “파꽃도 꽃이냐는 굳어진 생각”, 곧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발 밑이 절벽인 사람이 뭘 할 수 있을까, 사랑과 지지를 받아 마음의 힘이 충만한 사람이 아닌 내가 제대로 살 수 있을까, 날 위해 무언가 준비해주는 사람이 없어 온전치 못한 인생이 제대로 꽃필 수 있을까? 이파리 없는 꽃이 열매맺을 수 있을까?’하는 말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자신을 괴롭히기 일쑤다.
그러면 나는 지금 그 생각을 극복했을까? 극복하는 중이라 말하고 싶다.
시인은 2연에서 ‘오직 속을 비우기 위해 밀어올린 세월’이라고 했다.
파가 굵은 대를 뻗어올린 시간들은 치열했을 것이다. 초라한 만큼 더 치열했을 것이다.
지나고보니 속을 비우기 위해 밀어올린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무엇으로라도 채우려했던 속을 비워내는 중이다.
속을 비우기 위해서는 한 번 더 생각하는 일이 필요하다.
파꽃은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꽃대는 초라하고 잎은 없으나 열매는 많을 것이라고.
자신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고 나서야 파꽃의 속은 넓어졌을 것이다.
파꽃은 밀원식물이다. 꿀이 많은 파꽃 옆에는 항상 벌이 있다. 꽃이 있어도 그 꿀이 적으면 이동하는 에너지가 더 들기에 벌이 오지 않는데, 파꽃은 풍부한 꿀을 가져 벌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벌을 부르니 다른 작물의 결실에도 도움을 준다.
겨우 존재를 달성한 것들의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매운 눈물을 안으로 싸매둔” 파꽃이 더없는 밀원식물로, 다른 작물의 번식을 도와주는 작물로, 한 꽃봉에 많은 열매를 맺는 꽃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남다르게 초라한 시작을 견디는 시간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조윤지 시인의 눈을 빌어, 겨우 존재를 달성한 이들을, 파꽃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위로와 찬사를 보내고 싶다. 또 ‘파꽃도 꽃이라는 생각’을 되뇌며 내 자신을 비로소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내가 되어 보려고 한다.
차광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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