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 대피소로 내어준 펜션 주인…‘산불 현황 지도’ 만든 여행사 대표
“대피하시는 분들, 협소하더라도 저희 숙소로 오세요!”
‘속초-고성, 강릉 화재 현황 지도’를 만들어 구글 누리집에서 공유한 황주성(36)씨. 황씨가 만든 지도의 조회 수는 5일 오후 기준으로 4천회가 넘었다.
#1.
강원도 강릉시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황주성(36)씨는 4일 밤 11시 티브이(
TV
)로 뉴스를 보다가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노트북을 켜자마자 황씨가 들어간 사이트는 구글 사이트였다.
구글맵 코너로 들어간 황씨는 ‘나만의 지도 만들기’ 서비스를 이용해 지도 위에 점을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속초-고성, 강릉 화재 현황 지도’다.
황씨는 행정안전부가 운영하는 재난포탈 사이트에 들어가 재난 문자에 적힌 화재 현장 위치를 확인해 지도 위에 점으로 찍었다.
재난 문자 외에도 방송 뉴스 특보에서 현장 중계를 통해 보여주는 화재 지역도 체크했다.
황씨가 지도에 표시한 점을 클릭하면 ‘20:18 사진항 일대 대피권고’ ‘00:10 MBC 속초지사 연결’ 등 화재 피해가 확인된 지역의 위치와 피해 당시 시간이 뜬다.
이렇게 황씨가 2시간 동안 만든 지도는 5일 오후 기준으로 조회수가 4천회를 넘어섰다.
현장 주민들이 이 지도를 보고 화재 현황을 살펴본 뒤, 대피에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송이(36)씨가 운영하는 강원도 강릉시의 ‘로뎀나무 펜션’ 전경. 로뎀나무 펜션 홈페이지 갈무리
#2.
역시 강릉시에서 5년째 펜션을 운영하는 최송이(36)씨는 4일 밤 10시께 펜션 관리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늘 접속하는 맘카페에서 글을 하나 읽었다.
맘카페에는 ‘속초에서 불이 났는데 대피할 곳이 없다’는 글이 올라왔다.
2만명이나 되는 카페 회원들 중 일부는 “지금 당장 대피해야 한다” “대피할 곳이 마땅치 않다” 등 긴박한 상황을 예상케 하는 글을 올렸다.
글을 읽은 최씨는 곧장 카페에 글을 올렸다.
“대피하시는 분들! 협소하더라도 저희 숙소로 오세요! 빈방 내어드려요!”
최씨가 글을 올리자마자 곳곳에서 전화가 왔다.
20명이 넘는 아이들이 불길에 대피소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사연,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와 미취학 아이를 데리고 대피할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부부의 사연을 들었다.
최씨는 퇴근길 발길을 다시 펜션 쪽으로 돌려 밤 12시가 넘어서까지 대피 손님 30여명을 받았다.
4일 저녁 강원도 고성에서 시작한 산불이 속초 시내까지 옮겨붙는 등 고성·속초 등 지역에서 화재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 가운데 이재민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는 시민들의 힘이 눈길을 끌고 있다.
펜션 사장 최씨는 지난밤 초등학생 아이들과 몸이 불편한 어른 30여명, 갓난아기와 미취학 아이를 데리고 온 4인 가족을 자신의 펜션에 무료로 묵게 해줬다.
“사람들을 편하게 묵게 하는 건 어차피 제가 하는 일이고, 전체 방 9개 중 1개 방을 빼고는 다 비어 있는 상황이었어요. 관리실이든 별채든 다 내어줄 수 있으니 무조건 오라고 말씀드렸죠.” 최씨의 말이다.
최씨는 5일 새벽 3시까지 펜션에서 퇴근하지 못했다.
불을 피해 온 손님들에게 이불과 각종 살림 용품을 꺼내주고 잠자리를 마련해주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자정이 넘어 작은 버스에서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달라붙어 펜션에 도착한 아이들을 본 최씨는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아이들은 불이 난 줄도 모르고 마냥 피곤해 있었고, 어른들은 혹시 불길이 번질까 불안해하고 있었어요. 최대한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느 동네에서 왔는지, 어떤 단체에서 온 건지 등을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집에서 2~3시간 눈을 붙이고 10살 딸을 학교에 보낸 뒤 최씨는 부리나케 펜션으로 다시 출근했다.
손님들에게 대접할 빵·우유·컵라면 등을 사 가려던 찰나 손님들은 행여 장사에 피해를 줄까 봐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5일 아침 8시께 손님들은 화재 피해 없이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빈방 내어주는 데 무슨 결심이 필요한가요?” 어떻게 펜션을 대피소로 운영할 생각을 했냐는 질문에 최씨는 이렇게 답했다.
최씨는 전날 밤 펜션에 도착한 이들을 봤을 때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 어린 애들과 몸이 아프신 분들이 있으면 얼마나 다급하면 그 시간에 내려오셨겠어요. 제가 하루 안 자면 되지. 돌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 갓난아기를 속싸개로 싸서 데리고 온 부부들은 특별히 더 따뜻한 방으로 모셨어요.”
최씨는 5일에도 펜션 예약을 모두 받지 않기로 했다.
혹시 모를 재난 상황에 대비해 대피할 곳이 마땅치 않은 이재민들에게 우선 방을 내어주기 위해서다.
“내일은 예약이 꽉 차 있어서 그 손님들을 밀어내고 이재민들을 받긴 어렵겠지만, 관리실이나 별채는 예약이 없어도 묵을 수 있으니까 대피할 곳이 없는 분들은 언제든 펜션을 찾아줬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주변에 대피할 분이 있다고 하면 저희 펜션으로 오라고 말씀해주세요.” 최씨가 말했다.
황씨가 ‘고성-속초, 강릉 화재현황 지도’를 만든 건 2년 전 기억이 계기가 됐다.
2016년 황씨가 처음 강릉으로 온 이듬해 강릉시 성산면 인근에서 큰 산불이 났다.
강릉 외곽 지역에서 난 화재 정보가 그 동네 주민들에게는 곧바로 전달됐지만, 강릉 중심에서 사는 황씨에게는 소식이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방송뉴스에서 강릉 산불을 특보로 다루는 시간 5분도 화재현황을 즉각적으로 알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황씨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불이 어디까지 났는지, 내가 사는 동네로까지 번지고 있는 건지를 알 수가 없어 답답합을 느꼈습니다. 처가가 근처에 불이 났는데 혹시 피해를 당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불안하고 답답했던 기억은 황씨가 새벽 1시가 넘어서까지 지도에 점을 찍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속초-고성, 강릉 화재현황 지도’가 완성됐다.
온라인상에서 돌아다니는 소문들도 황씨의 행동의 계기가 됐다.
황씨는 지도를 만드는 작업 자체보다는 해당 지역에 실제 불이 난 게 맞는지 사실을 확인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투자했다고 한다.
그는 “전날 어느 커뮤니티에서 고성에 있는 아야진에서 불이 났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확인해보니 그곳엔 아직 불이 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진짜 피해 사실인 것처럼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주 꼼꼼하게 화재 지역을 지도에 점으로 표기했습니다.”
그렇게 찍은 지역이 5일 오후 기준으로 23곳이다.
이 지도를 본 누리꾼들은 “내가 있는 곳이 불길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려줘서 유익하다” “강원도에 친척이 살아서 걱정했는데 이 지도를 보면 어느 강원도 중 어느 지역에 불이 났는지 정확히 알 수 있어서 걱정이 놓인다”는 반응을 보였다.
황씨는 자신의 이 같은 노력이 화재 정보를 알리는 획기적인 시스템으로 발전할 수 있길 바란다.
황씨는 “불이 났을 때 시민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지금 불이 어디까지 났냐’는 겁니다. 티브이에서 보여주는 불이 나는 장면만으로는 화재 피해 범위를 정확하게 아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지도가 화재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황씨는 “그 지역 주민들에게 재난 상황은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5G시대에 뉴스와 문자메시지뿐만이 아니라 지도 등 다양한 방법이 구축돼서 다방면으로 재난 정보를 파악하고 자신에게 맡는 대피 방법을 세우는 시스템이 하루빨리 구축됐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어느 누리꾼은 속초·고성 등에서 운영하는 ‘강원도 산불 대피소 지도’를 만들어 온라인상에서 공유하고 있다.
이 지도의 조회 수는 5일 오후 기준으로 15만을 넘겼다.
이날 정부는 강원 지역 산불 사고를 ‘국가재난사태’로 선포했다.
강원도의 봄날은 새까만 재가 됐지만, 자발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시민들이 조금씩 희망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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