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작가 좋은글-김춘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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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제임스 윌러가 쓴 실화소설이다.

1960년대 미국 아이오와 주의 매디슨 카운티를 배경으로 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커버디자인을 위한 사진을 찍으려고 워싱턴 D.C.에서 온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와 우연히 집에 혼자 머무르는 중이었던 이탈리아계 가정주부인 프란체스카간의 나흘간의 사랑을 다루었다.

1992년 발표되었고, 1995년에 개봉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출연의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원작으로도 유명하다.

대한민국에서는 시공사에서 공경희가 번역한 원고를 출판하면서 소개되었다.

 

 

(목차)

* 시작에 앞서

* 로버트 킨케이드

* 프란체스카

*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소리

* 화요일의 다리

* 다시 춤출 수 있는 여유

* , 혹은 떠도는 영혼

* 재회

* 프란체스카의 편지

 

(줄거리)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군인을 따라 미국으로 온 프란체스카는 아이오와 주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어느 날 남편과 아이들이 며칠간 집을 비우게 되는데, 우연히 길을 묻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와 만나게 된다. 프란체스카는 로버트를 로즈먼 다리로 안내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가족들이 돌아올 날이 가까워지자 프란체스카는 갈등하고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에게 함께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프란체스카는 가족들을 버릴 수 없어 아이오와에 남기로 결정한다.

로버트는 프란체스카를 이해하고 홀로 떠나게 되고 프란체스카는 가족들과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의 변호사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다.

그 편지에는 로버트가 죽었으며 유골은 로즈먼 다리에 뿌려졌고 프란체스카에게 사진 한 장과 편지 한 통 등을 남겼다고 적혀 있었다.

로버트를 잊지 못한 프란체스카도 자신의 유골을 로즈먼 다리에 뿌려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자녀들은 훗날 둘의 사랑을 소설로 써달라고 작가에게 요청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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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에 앞서

붓꽃 밭에서, 먼지 이는 수많은 시골길에서 피어오르는 노래들이 있다.

이것은 그 노래들 중 하나다.

1989년 가을의 어느 늦은 오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의 커서가 깜박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예전에 아이오아 주에 살았다는 마이클 존슨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현재 플로리다에 살고 있다고 했다.

고향 친구가 책을 한 권 보내주었어요. 선생님이 쓰신 책이었습니다.”

마이클 존슨은 그 책을 읽었고, 그의 누이 캐롤린도 읽었다. 그들은 내가 흥미로워 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전화상으로는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캐롤린과 함께 아이오아에 가지요.”

그런 제의에 회의가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흥미가 쏟아났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 길래, 머나먼 길을 달려와서까지 들려주려고 하는 걸까. 그래서 나는 그 다음 주에 디모인에서 그들과 만나는 데 동의했다.

공항 부근의 홀리데이 인에서 소개가 이루어졌고, 차츰 어색함이 사그라졌다. 그들 남매는 내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밖에는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고, 가벼운 눈발이 뿌리고 있었다.

그들은 약속을 하라고 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겠다면 상관없지만, 만약 그러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릴 경우에는 1965년 아이오아 주의 메디슨 카운티에서 일어난 일이나, 그 후 25년에 걸쳐 벌어진 일들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 나는 그러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들었다. 열심히 들었고, 열심히 질문했다. 그들은 열심히 이야기 해 주었다.

캐롤린은 이따금씩 드러내 놓고 울었고, 마이클은 애써 울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서류와 잡지 스크랩, 그들의 어머니 프란체스카가 쓴 일기장들을 보여주었다.

룸서비스가 왔다가 갔다. 커피를 더 주문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미지를 그려 보기 시작했다. 이미지를 먼저 그려야만 그 다음에 말로 옮길 수 있으니까.

이윽고 나는 그 이야기를 소설로 옮기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정이 막 지났을 때, 이야기를 소설화 하는 데 동의 했다.

잘 안될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시도는 해보기로 했다.

이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그들로써는 퍽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의 어머니, 더욱이 아버지와 관련된 주변 환경이 미묘했다.

마이클과 캐롤린은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로 인해 결국은 천박한 소문이 떠돌게 되리라는 것을. - 리처드와 프란체스카 존슨 부부에 대해서 사람들이 품고 있던 기억이 어쩔 수 없이 평가절하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모든 형태의 신뢰가 산산조각이 나고, 사랑이 편리성의 문제가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그들 두 사람은 이 놀랄만한 이야기를 공개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그때 나는 그들의 평가가 옳다고 믿었고, 지금은 그보다 더 확실하게 믿는다.

조사하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마이클과 캐롤린을 세 차례 더 만났다.

그들은 매번 불평하는 일 없이 아이오와까지 와주었다. 이야기를 과연 정확하게 쓰고 있는지 그들은 성의를 다해 확인하고자 했다. 때때로 우리는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천천히 메디슨 카운티의 도로를 달릴 때도 있었다. 그들은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들을 지적해 주었다.

이 이야기는 마이클과 캐롤린이 도움을 준 것과 프란체스카 존슨의 일기장에 있는 정보들에 기초한 것이다.

또 미국의 북서부 지역, 특히 시애틀과 워싱턴 주의 벨링햄에서 조사 작업을 벌였고, 아이오아 주의 메디슨 카운티에서도 조용하게 조사를 했다.

로버트 킨케이트의 사진 에세이에서 정보를 얻었고, 잡지 편집자들의 도움도 얻었다.

사진 필름과 촬영 도구 생산업자들에게도 자문을 구했고, 오하이오 반즈빌이 고향인 근사한 노인 몇 분과는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킨케이드가 어렸을 적부터 그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애써 조사 작업을 벌였음에도 불충분한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그런 경우 내 자신의 상상력을 조금 덧붙였지만, 조사를 진행하면서 프란체스카 존슨과 로버트 킨케이드가 내 안에서 살아나, 어느 정도 확신이 설 경우에만 그렇게 했다.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에 매우 가깝게 다가갔다고 자신한다.

킨케이드가 미국 동북부 지역을 여행했을 때의 정확하고 자세한 경로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우리는, 후에 그가 출판한 수많은 사진에 기초해서 그의 여행 경로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 존슨도 일기에서 간단하게나마 거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고, 킨케이드가 잡지 편집인에게 남긴 메모도 있었다.

이런 자료를 길잡이로 삼아, 나는 그가 19658, 벨링햄에서 메디슨 카운티까지 갔으리라고 믿어지는 길을 되밟아 보았다.

답사의 마지막에 메디슨 카운티로 향하면서, 나는 마치 나 자신이 로버트 킨케이드가 된 기분이었다.

킨케이드라는 인물의 본질을 알려는 시도가 내 조사와 글쓰기 작업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그는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어떤 때는 상당히 정상적인 사람 같지만, 또 어떤 때는 미묘해서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인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일에서는 극도의 프로페셔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조직의 숫자만 채우기에 급급한 세상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수컷이라고 보았다.

한번은,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시대의 아픔을 토로한 적도 있었다.

프란체스카 존슨은 그를 기이하고, 유령이 도는 곳에, 진화가 덜 된 아주 먼 과거에사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두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아직도 해답을 얻지 못했다.

먼저, 우리는 킨케이드의 사진 파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낼 수가 없다. 그의 일하는 성격으로 미루어 - 수천 장의, 어쩌면 수십 만 장의 사진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사진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상의 추측은 - 그가 이 세상에서 살았던 동안,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자리매김의 방식과도 연관이 있는 데 - 그가 죽기 전에 몽땅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1975년에서 1982년까지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 부분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활용할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다. 우리는 그가 몇 년간 시애틀에서 초상화를 찍어주는 일로 푼돈이나마 벌면서 퓨젓사운드 지역에서 계속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사회보장국과 재향군인 관리국에서 그에게 보낸 우편물 전부를 그가 직접 반송이러고 적어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준비하고 쓰면서 나는 세계관이 바뀌었다. 생각하는 방식도 변했고, 무엇보다도 인간관계의 가능성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조사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프란체스카 존슨과 로버트 킨케이드를 알게 되면서, 인간관계의 울타리가 전에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넓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하게 되리라.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점점 냉담해지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이중 삼중으로 덧칠된 가면을 쓰고 있다.

어디까지가 위대한 열정이고, 어디까지가 지독한 감상인지. 난 자신에게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다가 위대한 열정에 대한 가능성을 비웃고, 진실하고 심오한 감정을 감상이라고 치부하려는 태도는 프란체스카 존슨과 로버트 킨케이드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따스한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나는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그런 상투적인 태도를 극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인 콜리지가 말했듯이, 의심의 먹구름을 걷고 다음의 이야기에 다가선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내가 경험한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무심했던 당신의 가슴 안에서 다시 춤출 수 있는 여유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프란체스카 존슨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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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킨케이드

196588일 아침, 워싱턴 주의 벨링햄.

로버트 킨케이드는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의 3층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자기 집 문을 잠갔다. 그는 사진 촬영 도구가 가득 든 배낭과 옷가방 하나를 들고 나무 층계를 내려가 복도를 통해 뒷문으로 나왔다. 아파트 입주자를 위해 마련된 주차 공간에 그의 낡아빠진 시보레 픽업트럭이 세워져 있었다.

트럭 안에는 이미 배낭 하나와 중간 크기의 아이스박스, 삼각다리 두 개, 카멜 담배 몇 상자, 더모스 보온병, 과일이든 가방이 실려 있었다. 트럭 뒤 칸에는 기타 상자가 있었다.

킨케이드는 배낭을 앞자리에 놓고, 아이스박스와 삼각다리 두 개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트럭 뒤 칸에 올라가서 기타 상자와 옷가방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놓고, 스페어타이어를 버팀목 삼아 긴 빨랫줄로 그 둘을 타이어에 묶었다. 그리고 닮아빠진 스페어타이어 밑으로는 검정색 방수 천을 깔았다.

그는 운전석에 앉아서 카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머릿속으로 점검을 하기 시작했다.

구색을 갖춘 필름 2백 통, 저속 코닥클롬, 삼각다리, 아이스박스, 카메라 세 대와 렌즈 다섯 개, 청바지, 카키색 바지, 셔츠, 그리고 촬영할 때 입는 조끼는 입고 있었다. 됐어.

그밖에 필요한 다른 물건이 있으면 여행 중이라도 살 수 있을 것이다.

킨케이드는 물 빠진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오래 신은 레드윙 부츠에 카키색 셔츠, 오렌지색 멜빵 차림이었다.

넓은 가죽 벨트에는 필요한 경우에 대비해 스위스제 군용 칼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817.

시동을 두 번째 걸고서야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기어를 변속해, 이제 막 햇빛이 들기 시작하는 골목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는 벨링햄의 도로를 타고 나가, 워싱턴 11번 도로를 탄 다음 남쪽으로 향하다가 퓨젓사운드 해안을 따라 몇 마일을 달렸다. 그러다가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20번 국도를 만났다.

햇빛이 드는 쪽으로 차를 돌린 그는 길고 구불구불한 캐스케이즈 마을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고장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이 풀어져서 이따금씩 차를 세우고, 앞으로 돌아 볼 구미가 당기는 곳을 메모하거나 그가 기억용 스냅사진이라고 부르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는 목적은, 다시 방문해서 더 자세히 접근해 보고 싶은 곳을 기억 창고에 담아두기 위해서였다.

오후 늦게 그는 스포케인에서 북쪽으로 돌아 2번 국도를 타고 북부의 여러 주를 가로질러 메네소타 주의 델루스까지 갔다.

그는 살면서 개를 한 마리 가졌으면 하고 수천 번도 더 바랐다.

골든리트리버(사냥개의 일종;옮긴이)가 한 마리 있으면 이렇게 여행을 할 때 좋은 친구가 되어 주련만. 그러면 집을 떠났다는 느낌이 한결 덜할 것이다.

하지만 밖으로 도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해외여행도 만만치 않게 잦았으므로 그것은 동물에게 공평치 못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너무 들어서 힘든 야외 작업을 하지 못하게 되면 개를 한 마리 기르겠노라고.

그때가 되면 개를 한 마리 데리고 살 수 있을지도 몰라.’

트럭 창문을 비켜 지나가는 침엽수에 대고 그는 중얼거렸다.

이런 드라이브는 언제나 침울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개도 그 일부분이었다.

로버트 킨케이드는 말할 수 없이 외로웠다. 외아들인데다가 부모가 다 돌아가셨고, 먼 친척들은 그가 어디서 사는지 몰랐고, 그도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 몰라 서로 연락이 되지 않았고, 가까운 친구도 없었다.

하지만 벨링햄의 길모퉁이 가게 주인과 그가 필요한 도구를 구입하는 사진 기자재 상점의 주인 이름은 알았다.

또 몇 군데 잡지사 편집자들과 공식적인 직업상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이상은 잘 아는 사람도 없었고, 또 그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집시는 보통 사람들을 친구로 삼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는 일종의 집시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킨케이드는 마리안 생각을 했다. 그녀는 9년 전 떠나갔다. 5년 동안의 결혼생활 후였다. 이제 그가 쉰두 살이니, 그녀는 마른 살이 채 안 되었으리라.

마리안은 포크싱어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워버즈의 노래 전부를 잘 알고 있었고, 시애틀의 커피전문점 몇 군데에서 그 노래들을 굉장히 잘 불렀다. 킨케이드는 집에 있을 때면, 그녀를 태우고 재즈 연주회장에 가서 그녀가 노래하는 동안 관객석에 앉아 있곤 했다.

그가 장기간 집을 비우는 일이 - 어떤 때는 두 달, 석 달씩 - 결혼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그들이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마리안도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이 다 애매하게나마 어떻게든 잘 해나가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아이슬란드에서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그녀는 떠나고 없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로버트 잘 되질 않았어요. 당신에게 하모니 기타를 남기고 가요. 계속 연락하세요.’

그는 계속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1년 후 이혼서류가 오자 그는 서명하고,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날아갔다. 마리안은 자유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밤늦게 몬태나 주의 칼리스펠에서 차를 세웠다. ‘코지 인은 숙박비가 비쌀 것 같지 않았고, 과연 그랬다.

그는 객실로 소지품을 옮겼다. 테이블 램프 둘 중 하나는 전구가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아프리카의 푸른 산들>을 읽으면서 맥주를 마시노라니 칼리스펠의 제지공장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아침에 그는 40분간 조깅을 하고, 팔굽혀펴기를 쉰 개 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아령 삼아 늘 하는 체조를 했다.

몬타나의 꼭대기를 달려 북 다코타 주로 접어들었다.

그는 메마르고 평편한 이 지방이 산맥이나 바다만큼이나 매혹적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엄숙한 아름다움 같은 것이 있었다.

킨케이드는 몇 번이나 차를 멈추고, 삼각다리를 세우고 고풍스런 농장 건물을 흑백으로 촬영했다. 이런 풍경이 그의 작가적인 구미에 맞았다.

인디언 거주 지역은 쇠락해 가고 있었다.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하는 마을.

인디언들이 북서부 워싱턴에 자리 잡았다고 해서 환경이 더 좋아졌다고 말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그가 본 인디언 마을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814일 아침, 덜루스를 떠나 두 시간을 달려 그는 북동쪽을 빠져나가 히빙(메시비 산지에 있는 철광석 채굴 중심지 ;옮긴이)과 철광산으로 올라가는 뒤편 도로를 탔다.

공기 중에 빨간 먼지가루가 떠다녔고, 커다란 기계와 철광석을 슈피리어 호의 운송선으로 실어 나르도록 특별히 고안된 기차가 있었다.

킨케이드는 히빙을 둘러보면서 오후 한낮을 보냈다.

보브 딜런이 출생한 곳이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별로 들지 않았다.

보브 딜런의 노래 가운데 그가 정말로 좋아하는 곡은 <북부지방에서 온 소녀> 딱 한 곡이었다. 그는 그 노래를 연주하면서 노래할 수 있었다.

킨케이드는 그곳을 뒤로 하면서 혼자 노래를 흥얼거렸다. 마리안은 그에게 코드 몇 개와 초보적인 기타 반주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그녀에게 남겨준 것보다 그녀가 내게 남겨 준 것이 더 많았지요.”

그는 전에 아마존 유역 어느 곳의 맥컬로이 바라는 곳에서 어떤 주정뱅이 뱃사람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슈피리어 국립공원은 근사했다. 정말로 멋졌다. 뱃사공의 고장.

킨케이드는 어렸을 때 배로 운송하는 시절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었다. 그러면 그도 뱃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초원 근처를 달리면서 세 마리의 어미 사슴과 수많은 아기 사슴들. 그리고 붉은 여우를 보았다.

연못에서 차를 멈추고, 이상한 모양의 나뭇가지가 물에 그림자를 드리운 장면을 몇 장 찍었다.

촬영을 끝내고, 트럭 뒤 칸에 걸터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카멜 한 대를 피우면서 자작나무 숲에 바람 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여자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는 담배연기가 연못 위로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나이가 드니 마음이 이상해지는군.’

하지만 그가 집을 떠나 있는 일이 너무 잦으니, 집에 남은 사람에게는 고통일 터였다.

이미 겪어봐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킨케이드는 벨링햄의 집에 있을 때면 시애틀의 광고 대행사에서 부장으로 일하는 여자와 이따금씩 데이트를 했다. 그녀와는 공동 작업을 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여자는 마흔두 살이었고, 밝고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킨케이드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하게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도 때때로 두 사람이 다 약간 외로울 때면,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다. 영화관에 가고, 맥주를 홀짝이고, 상당히 근사한 사랑의 행위를 나누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한 여자였다.

두 번 결혼한 경험이 있었고, 대학에 다니면서는 몇 군데 바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었다. 정사를 나눈 후 함께 누워 있을 때면 그녀는 어김없이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

당신, 최고에요. 로버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어요. 누구도 당신을 따라잡기는 불가능할 거예요.”

남자라면 누구라도 듣기 좋아할 말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경험이 많지 않은 그로서는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한 번은 그녀가 그의 마음을 맴도는 이야기를 했다.

로버트. 당신 안에는 내가 들춰낼 수 없는 뭔가가 있어요. 나는 거기에 닿을 힘이 없어요. 때때로 당신이 여기 오랫동안, 한 사람의 생애보다도 더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혼자만의 공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요. 당신은 내게 다정하게 대해주지만, 나는 당신이 두려울 때가 있어요. 당신을 향하는 내 마음을 제어하려고 나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난 내 중심을 잃게 되고 말 거레요. 그래서 다시는 찾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는 어렴풋이나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킨케이드는 오하이오 주의 작은 마을에서 자라던 소년시절에도 생각이 많은 아이었다. 넘쳐나는 생각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감상에 잠기곤 했다. 다른 아이들이 <저어라, 저어라, 노를 저어라> 같은 노래를 부를 때면 그는 그 영어 가사를 프랑스의 카바레 노래에 갖다 붙이곤 했다.

그는 낱말과 이미지를 좋아했다. ‘블루라는 말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였다. 그 말을 할 때, 입술과 혀가 만들어내는 느낌이 좋았다. 어릴 적부터, 낱말에는 단순한 의미뿐만 아니라 뭔가 느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킨케이드는 또 머나먼’ ‘나무를 땐 연기’ ‘고속도로’ ‘옛날’ ‘통과’ ‘뱃사람’ ‘인디아같은 낱말을 좋아했다. 이런 말이 소리 나는 방식과 혀끝에 맴도는 감칠맛 - 또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좋아 하는 낱말을 적은 목록을 벽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또 낱말들을 조합해 구절을 만든 다음, 벽에 붙여 놓곤 했다.

 

 

- 가까이 하기엔 너무 뜨거운 불.

- 나는 몇 안 되는 여행자 무리와 함께 동쪽에서 왔다.

- 나를 구해주려는 사람들과 나를 팔려는 사람들은 계속 즐거운 듯 지껄인다.

- 부적이여, 부적이여, 내게 너의 비밀을 보여 달라.

- 키잡이여, 키잡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라.

- 푸른 고래들이 헤엄치는 곳에 벌거벗고 누워 있기

- 그녀는 그가 겨울의 역을 떠나는 증기 기관차이기를 원했다.

- 어른이 되기 전에 나는 화살이었네. - 아주 오래 전에.

 

 

자신이 좋아 하는 이름을 적은 목록도 있었다.

소말리 해류, 빅 해쳇 산맥, 그리고 다른 이름도 길게 씌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조차도 그가 남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다.

킨케이드는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다가 세 살이 되자 어느 새 완전한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다섯 살 무렵에는 무엇이나 거침없이 읽게 되었다.

그는 학교에서는 무덤덤한 학생이어서 선생들을 조바심 나게 했다.

학교 선생은 그의 아이큐 지수를 보고 그에게 성취에 대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주었다.

너 정도의 수준이라면 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해주었다.

고교 선생님 한 분은 그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썼다.

그는 아이큐 지수가 사람의 능력을 평가 하는 데 좋지 못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아이큐 테스트가 사람의 신비로운 일면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비스러움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고, 또 논리적인 것의 보완 물로도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의 부모와 면담이 필요하다.’

그의 어머니는 선생님 몇 분과 만났다. 선생님들은 로버트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괴팍스러운 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로버트는 자기가 만든 세계 속에서 살고 있어요. 내 아들인 것이 분명한데도 이따금씩은 그 애가 남편과 나 사이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 같아요. 그 애가 돌아가려고 애쓰는 다른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유배된 아이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아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애에게 학교에서 더 잘 하라고 한 번 더 용기를 북돋워 주겠습니다.”

킨케이드는 지방 도서관에서 모험소설과 여행에 관한 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무도회나 풋볼 게임 같은 떠들썩한 일은 질색이었다.

 

카운티2.png

 

* 프란체스카

프란체스카의 생일은 깊은 가을이었다.

찬비가 남부 아이오와 주 시골에 있는 그녀의 집 창을 때렸다. 그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빗줄기 사이로 미들 강 언덕을 따라 시선을 옮겨가며 리처드를 떠올렸다.

그는 8년 전,

그녀로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이제 그를 기억하면서 변함없이 친절하고, 한결같으며, 그리고 그녀에게 편안한 인생을 선물해 준 그의 모습을 생각했다.

아이들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그녀는 올해 67번째 생일을 맞았지만 두 아이는 다 집에 올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이해했다. 아이들 둘 다 한창 일할 때였다.

병원을 운영하느라,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일에 휘둘리며 살았다.

마이클은 두 번째 결혼 생활에 접어들었고, 캐롤리는 첫 번째 결혼생활에 고군분투 하는 중이었다.

사실 프란체스카는 아이들이 올 수 없는 것이 내심 다행스러웠다. 그녀는 그날을 위해 나름대로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이날 아침, 인터셋에 사는 친구들이 생일 케이크를 가지고 들렸다. 프란체스카는 커피를 만들었고, 친구들은 손자 아이들, 그 지역 이야기, 추수 감사절 이야기, 크리스마스에 누구에게 무엇을 사 줄 것인가 하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거실에서는 나직하게 웃음소리가 났고 말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편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리처드가 죽은 후에도 이곳에 머무르는 작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마이클은 플로리다로 오라고 권했고, 캐롤린은 뉴잉글랜드로 이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부 아이오와의 언덕들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살고 싶었다.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예전 주소를 그대로 간직하며 살았고, 그러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프란체스카는 점심때쯤 떠나는 친구들을 배웅했다. 그들은 뷰익과 포드를 몰고 도로를 따라 가다가 포장된 시골길로 들어서서 원터셋으로 향했다.

와이퍼가 움직이며 빗방울을 밀어냈다. 그들은 프란체스카의 마음속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테고, 말해 준다고 해도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친구들이었다.

남편은 전쟁이 끝난 후 나폴리에서 이곳으로 그녀를 데려오면서 좋은 친구들을 찾게 될 거라고 말했다.

아이오와 사람들은 결점이 있기는 하지만, 누구 하나 다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거든.”

그 말은 옳았고, 지금도 그랬다.

리처드를 만날 때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3년이 지났고, 사립 여학교에서 선생 노릇을 하면서 인생에 대해 의구심을 느낄 무렵이었다.

대부분의 이탈리아 청년은 죽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그녀는 검은머리에 리본을 두르고 꿈에 매달려 살았다. 하지만 어떤 미남 선원도 그녀를 찾으러 오지 않았고, 거리에서 그녀의 위층 창문에 대고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도 없었다. 압박해 오는 현실감이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리처드는 그럴 듯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친절했고, 미국으로의 달콤한 꿈을 내밀었다.

지중해의 햇살을 받으며 함께 카페에 앉아 있을 때면, 프란체스카는 군복 차림의 그를 찬찬히 살폈다. 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와 함께 아이오와로 왔다.

그의 아이를 낳게 되었고, 추운 10월의 밤 마이클이 풋볼 경기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캐롤린을 데리고 디모인으로 댄스파티용 드레스를 사러 가게 되었다.

그녀는 매년 몇 차례씩 나폴리에 사는 언니와 서신 왕래를 했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었을 때 두 차례 그곳에 갔다. 하지만 이제는 메디슨 카운티가 그녀의 집이었고, 다시 나폴리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 따위는 없었다.

한낮에 비가 멈추더니 저녁이 되기 전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어스름 무렵, 프란체스카는 작은 잔에 브랜디를 따르고, 리처드가 쓰던 뚜껑 달린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리처드네 집안에서 3대째 대물림해온 호두나무 책상이었다. 그녀는 마닐라 봉투를 꺼내어 천천히 쓰다듬었다. 매해 이날이면 그래왔듯이.

워싱턴 주 시애틀, 912. 1965’ 라는 소인이 찍혀 있었다. 그녀는 먼저 소인을 보았다. 그것은 의식의 일부분이었다.

그러고 나서 길쭉하게 쓴 주소, 프란체스카 존슨, RR2.아이오와 주 원터셋다음에는 봉투 왼편 상단에 아무렇게나 갈겨 쓴 보낸 사람의 주소, ‘사서함 642, 워싱턴 주 벨링햄

그녀는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주소들을 들여다보며 신경을 모았다.

거기에는 그의 손의 움직임이 담겨 있었으니까.

그녀는 22년 전 그의 손길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몸에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 그녀는 봉투를 열어 조심스럽게 편지 석 장과 짤막한 원고, 사진 두 장, <내서날 지오그래픽> 한 권과 다른 잡지에서 오린 기사들을 꺼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는 그곳에서 그녀는 브랜드를 홀짝이며, 유리잔 너머로 타자 친 원고 위에다 직접 손으로 써서 붙인 메모를 보았다.

그의 전용 편지지에 쓴 편지였다. 위쪽에는 분명한 활자로 로버트 킨케이드, 작가이자 사진작가라고만 씌어 있었다.

910, 1965

 

 

친애하는 프란체스카.

사진 두 장을 동봉하오. 하나는 해 뜰 무렵 초원에서 찍은 당신 사진이오.

당신이 나처럼 이 사진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소. 또 하나는 당신이 붙여놓은 쪽지가 보이는 로즈먼 다리를 찍은 것이오.

나는 여기 앉아 잿빛 마음으로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의 한순간 한순간을 더듬고 있다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되풀이해서 묻소. ‘아이오와의 메디슨 카운티에서 내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나는 기억을 되살리려고 무진 애를 쓴다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여기 동봉한 ‘z차원에서의 추락이라는 가벼운 글을 적었소. 내 혼돈을 정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말이오.

렌즈 통을 내려다보면 그 끝에 당신이 있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소. 당신에 대해서 말이오.

아이오와에서 이곳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알 수가 없소. 어쨌든 털털이 트럭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다주었지만, 온 길을 거의 기억할 수가 없다오.

몇 주 전 나는 상당한 만족을 느꼈소. 어쩌면 심오한 행복은 아니겠지만, 약간의 외로움이 섞인 것이겠지만, 적어도 만족스럽기는 했소. 아무튼 모든 것이 변해 버렸소.

오랫동안 내가 당신을 향해, 당신이 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하오.

우리가 만나기 전에는 서로를 몰랐지만, 분명히 우리가 함께 되리라는 확신이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도 저 가슴 밑바닥에서 쾌활하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오.

하늘의 부름을 받아 광활한 초원을 나는 외로운 두 마리 새처럼, 그 모든 세월과 인생 동안 우리는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오.

그 길은 정말 이상한 곳이오. 8월의 어느 날. 길을 따라 가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당신이 잔디밭을 지나 내 트럭으로 다가오고 있었소. 되돌아보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던 듯싶소. 달리는 될 수가 없었던 것 같소. 어쨌든 거짓말 같은 현실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오.

나는 여기서 내 안에 있는 다른 사람과 함께 거닐고 있소.

우리가 헤어지던 날, 내가 말했지요. 우리 둘이서 제3의 인물이 창조되었다고.

그 말이 적절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드오.

그리고 이제 그 다른 존재가 내게 접근하고 있소.

어떻게든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하오. 어디서든. 언제든.

뭐가 필요하거나 그냥 나를 보고 싶거나 하면 내게 전화해요.

난 언제든지 당신이 부르는 곳으로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소.

언제 여기 올 수 있는지 내게 알려 줘요. 언제라도. 비행기 비용이 문제라면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소.

다음 주에는 인도 남동부로 가지만 10월 하순에는 돌아 올 거요.

- 당신을 사랑하는, 로버트 -

 

 

추신 ; 메디슨 카운티에서 찍은 사진이 잘 나왔소.

내년 <내서날 지오그래픽>을 찾아 봐요.

혹시라도 내가 잡지를 한 권 보내주길 바란다면 말만 해요.

 

 

프란체스카 존슨은 브랜디 잔을 널찍한 참나무 창틀 위에 내려놓고, 그녀가 찍힌 8x10 사이즈의 흑백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22년 전, 그 당시에 그녀가 어떤 모습인지 기억하기 어려울 때가 가끔 있었다.

몸에 끼는 물 빠진 청바지. 샌들, 하얀 티셔츠 차림으로 울타리 기둥에 기대선 그녀의 머리칼이 아침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카운티1.png

 

 

* 손가락에 쥐가 나도록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마련한 텍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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