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바크 / 류시화 / 제일출판사 / 1991년3월20일
얼마나 놀라운 가!
당신과 내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시간 속을 떠돌다 단 하루,
어쩌면 그보다 짧게 세상에 나와서 탄생과 죽음이라는 이 신비한 놀이에
우연히 함께 하고 있으니
- E. E. 커밍스 -
이제 이 세상엔 공룡 같은 것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용감한 기사라든가, 신비한 숲속을 미끄러지면서 사슴과 나비들에게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는 공주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고 우리는 말한다.
눈을 돌릴 미지의 세계도, 새로운 모험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우리는 쉽게 생각하고 끝낸다.
이제 이 세계의 운명도 이것으로 끝장이어서 희망의 불꽃마저 차갑게 식어버렸다고.
하지만 착각은 자유다. 공주라든가, 기사, 매혹적인 미소, 공룡, 신비, 모험 …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 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늘 이 세상에 있어 왔다.
물론 그것들은 이 시대에선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공룡들은 오늘날 정치라는 얼굴을 하고 서서, 길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여러 재난이나
실패에 대한 우리 자신의 두려움, 그것 또한 이 시대의 공룡이다.
우리가 땅에서 눈을 들어 보다 높은 걸 꿈꾸기만 해도, 아니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걸어가라고 배운 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사회의 괴물들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덮쳐누른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들 내면에 있는 공주나 기사들이 감히 얼굴을 못 내밀고 잊혀가는 게 아닐까?
하지만 진리를 깨달은 스승들은 우리의 꿈속에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겐 아직도 공룡과 맞서 싸울 방패가 남아 있다.’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바라는 대로 - 이 세상을 바꿔나갈 크나큰 생명의 힘이 우리 속안에 흐르고 있다고.
문득 깨달은 순간 진실은 우리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다.
“우리는 먼지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기적이다!”
여기 이 책은, 다 죽어가던 어떤 기사와 그에게 생명을 불어 넣은 한 공주의 이야기다.
궁전과 아름다움과 짐승들 그리고 삶의 신비 … 또한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는 죽음의 힘과 실제로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힘에 대한 이야기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가장 절실한 어떤 모험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는 실제로 내가 체험한 일들이 적혀 있다.
몇 가지 시간적인 순서나 등장인물들은 조금씩 바뀌었고 대부분의 이름은 내가 따로 생각해 내었다.
하지만 그 나머지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진실이라는 것은 그럴 듯하게 꾸며 낸다고 해서 생겨나는 게 아니니까.
그리 많지는 않지만 몇몇 독자들은 작가가 쓰고 있는, 가면 뒤를 볼 줄 안다.
당신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면, 도대체 어떤 힘이 나를 밀어붙여 백지 위에다 이 글들을 쓰게 했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가 또한 독자들의 마음속을 꿰뚫어 볼 줄 안다.
행운이 뒤따라 준다면 나는 이 책 속 어딘가에서, 나와 내 사랑하는 이를 따라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이가 함께 걸어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리차드 바크 -
(1)
오늘은 와 있겠지 …. 프로펠러 소리와 바람을 가르며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만치 가을 들판 속에 내가 세낸 작은 건초 밭,
수수깡더미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고, 농장 입구에 내가 매달아 놓은 <3달러로 창공을!>이란 현수막도 보였다.
현수막 앞의 길 양쪽엔 많은 차가 모여 있었다. 적어도 예순 대는 넘어 보였다. 모두가 내 비행 쇼를 구경하러 온 것이다.
지금 그녀도 저곳에 와 있겠지 …. 이제 막 도착했을 것이다. 나는 그곳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제발 그러기를!
비행 속도를 서서히 늦추고 기수를 위로 향하게 한 다음 날개를 수평으로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왼쪽 방향타를 힘껏 밝으면서 조종간을 뒤로 잡아당겼다.
푸르른 대지, 추수를 앞둔 옥수수와 콩, 한낮의 평화로운 농장과 목초지들이 한데 엉클어져 천지사방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내 쌍날개 비행기는 폭발이라도 할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회전하면서 아래로 곧장 떨어져 내려갔다.
신비의 여인, 내 영혼의 동반자가 될 당신을 난 얼마나 찾아 헤맸던가. 마침내 오늘, 당신은 우연히 이곳까지 왔다.
당신은 지금 저 아래 건초 밭에 서 있다. 당신은 몰려 있는 사람들 주위로 걸어 올 것이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저토록 눈부신 물체 하나가 하늘에서 빙빙 돌고 있는지 의아해 하면서, 다만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는 이 역사의
한 장면에 호기심을 느끼며 다가올 것이다.
두 날개가 회전할 때마다 세찬 반동이 느껴졌다. 나와 내 쌍날개 비행기는 그렇게 천 피트나 떨어져 내려갔다.
회오리바람은 매순간 더 거세고 빨라졌으며 귀가 멍멍했다.
더 빨리 … 자 … 지금이다!
조종간을 앞으로 미는 동시에 왼쪽 발을 뗀 다음 오른쪽 방향타를 힘껏 밟았다.
눈앞이 흐릿해지는 소용돌이가 한두 바퀴 더 있고 나서 회전이 멈추었다.
오늘은 틀림없이 와 있겠지 …. 그녀 또한 나처럼 혼자니까! 당연히 혼자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껏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배워왔을 테니까.
그리고 우연히든 필연이든 그녀가 만나야할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바로 지금 이 쌍날개 비행기를 타고 곡예를 펼치고 있는 나 한 사람뿐이니까.
급선회한 다음 속도를 줄이고 엔진을 껐다. 프로펠러도 정지 … 내 쌍날개 비행기는 익숙하게 땅에 닿아 소리 없이 미끄러지다가 군중들 앞에 멈추었다.
첫눈에 나는 알아볼 것이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생각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대번에 알 수 있다.
남자와 여자들, 소풍가방을 든 가족들, 그리고 자전거를 탄 애들까지 비행기 주위로 몰려들었다. 개들도 두 마리 달려들었다.
조종석에서 몸을 일으켜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맘에 들었다.
“자, 여러분! 하늘에서 이 들판을 내려다봅시다. 이 숲과 농장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걸 상상만이라도 해보세요. 멋진 경험이 될 거예요. 눈 내리기 전에 마지막 찬스입니다. 자, 새들과 천사들을 만나러 높이 올라가 봅시다!”
입으로 이렇게 떠들면서도 내 눈은 군중들 속에서 열심히 그녀를 찾았다.
누군가 먼저 비행기에 올라타기를 바라며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어떤 얼굴은 겁내는 표정이었고, 어떤 얼굴은 한 번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잔뜩 신이 나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내가 찾는 얼굴은 없었다.
여자 하나가 소리쳤다.
“정말 안전한가요? 당신이 비행하는 모습을 보니 미덥지가 않아요.”
햇볕에 탄 얼굴, 갈색 눈의 그녀는 다짐이라도 받겠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맘 푹 놓아도 됩니다. 부인! 새털처럼 가벼우니까요. … 이 쌍날개 비행기는 1928년 12월 24일 이래로 줄곧 비행을 했답니다. 고물이 되기 전에 한 번쯤은 더 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놀란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농담도 못하나요? 우리가 다 늙은 뒤에도 이 비행긴 여전히 하늘을 날고 있을 거예요. 내가 보장하죠!”
“난 정말 옛날부터 이런 비행길 한 번 타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두고 봐요, 홀딱 반할 테니 …”
시동을 걸기 위해 프로펠러를 돌리고 나서, 나는 그녀가 조종석 옆자리로 올라타는 걸 도와주었다. 그러고는 안전벨트 매는법을 일러주었다.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녀가 안 왔다니 …, 그녀가 여기에 없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날마다 나는 오늘이야말로 바로 그 날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날마다 빗나갔다.
해가 질 때까지 나는 쉬지 않고 서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태우고 곡예비행을 했다.
줄곧 떠들고 선전을 하면서. 날이 저물자 사람들은 저녁을 먹거나 잠자리에 들기 위해 제각기 떠나가 버렸다. 이윽고 나 혼자 남았다.
나 혼자. 그녀는 정말 내 상상 속에만 있는 인물일까?
글쎄. 물이 끓기 시작할 때 나는 모닥불 위에서 냄비를 내려 커피가루를 털어 넣고 갈대줄기를 꺾어 저었다. 은근히 속이 상했다.
“멍청한 짓이지 … 이런 곳에서 그녀를 찾으려 하다니.”
지난주에 산 빵을 꺼내 막대기에 끼워 사그라져가는 불길에 구웠다.
1970년 이후 나는 이 낡은 쌍날개 비행기를 몰고 순회 비행 공연을 다니는 일을 계속했다. 한때 그것은 모험 넘치고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젠 곡예비행을 하는 비행사들이 너무 많아졌고 또 안전하기 때문에 그냥 예삿일이 되고 말았다.
수천 번이나 곡예비행을 거듭한 결과 나는 이제 눈을 감고서도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천이 넘는 사람들을 태우고 하늘을 날았다.
그런데 이제야, 이런 허허벌판에서 내 영혼의 동반자가 나타나리라고 기대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닫게 되었다 ….
사람을 태워주고 비행기 쇼를 펼치는 이 일을 계속하는 한 충분한 돈이 생길 것이고, 하다못해 굶어 죽지야 않을 것이다.
그 대신 나는 어떤 새로운 것도 배우지 못하면서 그저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기만 할 것이다.
이태 전 여름, 진실로 무엇인가를 배웠던 적이 있었다. 그것으로 마지막이었지만, 그 여름 어느 날 나는 들판에서 희고 금빛 나는 쌍날개 비행기 한 대와 낯선 순회 비행사를 만났다. 그 사람이 바로 내 작품 『환상』에 나오는 「도날드 시모나」였다.
그가 바로 메시아이기를 거부한 메시아, 구세주로 불리기를 거부한 인물이었다.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되었다. 죽음을 앞둔 몇 달을 그는 자신의 신비한 소명에 따라 살고 있었다.
그 당시 내가 적어 두었던 기록은 책으로 엮어져 얼마 전에 세상에 나왔다.
나는 그의 가르침을 대부분 실제로 해보았으며 이제는 달리 해볼 새로운 것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영혼의 동반자를 찾는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었다.
비행기 꼬리 부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른 풀 더미를 밟는 발자국 소리였다.
내가 몸을 돌리자 조용해졌다. 그러다 다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어둠 속을 살폈다. 여우일까, 아니면 사자? 아니다. 이런 곳에 아직까지 사자 따위가 남아 있을 리 없지 ….
다시금 마른 풀 더미를 밟는 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 아하, 이건 틀림없이 이리란 놈일 게다 …,
나는 서둘러 연장주머니 안에서 망치를 꺼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비행기 바퀴 옆에 희고 검은 털을 한 악당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악당은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뜯어보면서 부드러운 수염에 뒤덮인 코로 여기저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이리가 아니었다.
“어 … 뭘 하고 있는 거야?”
놀라 심장까지 뛰었던 게 우스워서 나는 연장 도구를 치우고 있는 체 했다.
꼬마 너구리였다. 중서부 지방에서는 너구리를 잡아 애완용으로 기르다가 한 살 쯤 되면 들판에 놓아준다. 그래도 너구리들은 여전히 귀엽다.
‘왜 그렇게 놀라죠? 건초더미 위를 부스럭거리며 걸어 다닌 게 뭐 잘못인가요? 아저씨 같은 야영객에게 혹시 먹을 게 있나 싶어서 잠시 기웃거린 게 그리 큰 잘못인가요?’
“아, 아냐 …. 이쪽으로 와. 꼬마 친구! 배가 고프단 말이지?”
‘조금이면 돼요. 초콜릿 한 조각이나 … 비스킷? 틀림없이 비스킷이 있죠?’
꼬마 너구리는 잠시 뒷발로 서서 코를 실룩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혼자서 다 먹어치울 생각이 아니라면 그걸 좀 줘요.’
나는 가방을 집어 안에든 먹을 것들을 담요 위에다 쏟았다.
“여기 있다. 이쪽으로 와 ….”
먹을 것 위로 뛰어들어 꼬마 너구리는 비스킷을 한 입 가득 물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씹어 먹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만든 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과자 부스러기만 다 먹어 치웠다. 하나 남은 사과까지 갉아먹고 나서 냄비에 부어준 물도 다 핥아먹었다.
그러더니 모닥불을 바라보며 잠시 앉아 있다가 이젠 슬슬 떠나야 할 시간이라는 듯 코를 벌름거렸다.
“와 줘서 고맙다!”
까만 눈동자가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먹을 걸 줘서 고마워요. 아저씬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 아니군요. 내일 밤 다시 만나요. 하지만 아저씨가 만든 빵은 정말 너무했어요.’
보풀거리는 솜털로 뒤덮인 그 새끼동물은 줄무늬 쳐진 둥근 꼬리를 흔들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른 풀 더미를 밟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져 나중에는 아주 희미해졌다. 이제 다시 나 혼자 남았다. 영혼의 여인에 대한 나의 염원과 이런저런 생각들과 함께 …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또 다시 그녀에 대한 생각에 빨려들었다. 어디선가 꼭 만나겠지. 내가 바라는 여자는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니까!
〈도날드 시모다〉라면 뭐라 했을까? 만일 오늘밤 그가 이 비행기 날개 아래 나타나 내가 아직도 그녀를 찾아 헤매는 걸 알면 뭐라 말할까?
그는 아주 간단하게 말할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언제나 단순하다. 아직도 내가 그녀를 찾고 있다고 하면 그는 과연 뭐라고 할까? 영감을 떠올리기 위해 빵조각을 천천히 뜯어먹다가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이렇게 말하겠지.
“리처드, 바람처럼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아다닌다고 해서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오히려 더 멀어지지 않을까?”
역시 간단하다. 그런 다음엔 내가 어떤 대꾸를 하든 조용히 기다리겠지. 난 이렇게 대답했을 테고. 그가 여기 있다면 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좋아요. 하늘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제 잘못된 방법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 두겠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녀를 찾죠?”
그는 내가 스스로 해답을 구하지 않고 자기에게 묻는데 화가 나 눈을 가늘게 뜰 것이다.
“자넨 지금 행복한가? 자넨 지금 자네가 바라는 대로 살고 있는가?”
당연한 뜻이 난 대답하겠지. 물론 나는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삶을 누리고 있다고 ….
하지만 차가운 밤공기가 몰려들고 그가 똑 같은 질문을 다시 했을 때 뭔가가 달라졌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정말 내가 가장 바라는 걸 잘 하고 있는가?
“아니다!”
“뜻밖이군!”
시모다는 다시 물을 것이다.
“그게 뭘 뜻하는지 알고나 하는 대답인가?”
나는 퍼뜩 상상에서 깨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물론 알고 있다. 그것은 이제 내가 이 떠돌이 비행을 집어치우겠다는 뜻이다. 이 밤이 들판에서 지새는 나의 마지막 밤이 될 것이다. 설사 내가 다시 비행을 한다 해도, 다시는 손님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겠다!”
나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떠돌이 비행은 이것으로 끝이다!”
문득 슬며시 다가오는 충격, 의혹의 메아리 …
한동안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젠 뭘 해야 하는가? 어떤 일이 나에게 닥쳐올 것인가?
곡예비행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그만둔다고 생각하자 문득 바다 저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차가운 파도처럼 새롭고 놀라운 느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는 과연 이제부터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고들 한다. 나는 이제 금방 한쪽 문이 닫히는 걸 보았다. 그 문엔 〈떠돌이 비행〉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문이 닫힘과 동시에 그동안 내가 했던 여러 모험들도 죄다 과거가 되어 버렸다. 이젠 다른 쪽을 찾아야 할 때다. 방금 열린 또 다른 문은 어디에?
만약 나에게 세상을 보는 안목이 있다면, 시보다 말고 바로 내 자신이 보다 깊이 볼 줄 아는 눈을 갖고 있다면, 스스로 어떤 해답을 내릴 것인가.
잠시 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네 주위를 둘러 봐. 그리고 뭐가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물어 봐.”
나는 어둠 속을 둘러보았다. 하늘엔 잘못된 게 없다. 일천 광년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폭발하고 있는 저 다이아몬드 빛깔의 별들에게고, 또 한적한 곳에서 저 불꽃놀이를 지켜보고 있는 나에게도 잘못된 건 없다. 내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이 듬직하고 충실한 비행기에게도 잘못된 건 없다.
그렇다면 잘못된 것은 딱 하나, 그녀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뭔가 새로운 걸 하려는 게 아닌가?
서둘지 말게 리차드! -
제발 이 순간만은 냉정하게. 서둘 필요 없어. 먼저 신중히 생각하게.
아니나 다를까, 어둠 속에 또 다른 질문이 도사리고 있었다. 내가 도날드 시모다에게 물어 본 적도 없으며, 그가 말해 준적도 없는 전혀 새로운 질문이.
〈지난 수세기 동안 우리를 가르쳐 온 그 숱한 선각자들, - 그들은 왜 하나같이 혼자 살았을까?〉
왜 그들 곁에는 모험과 사랑을 함께 나누는 지성적인 아내가 없는 것일까?
이 세상엔 왜 그런 놀라운 부부가 없을까?
소위 깨달았다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리석은 제자들과 호기심 많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다. 병울 고치거나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만이 그들 곁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 곁에 멋있고 신비한 연인, 영혼의 동반자가 있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보았다면 몇 명이나? 아주 많이? 아니면 단 한 명도?
나는 목이 말라 침을 삼켰다. 지금껏 본 적이 없다.
깨달았다는 사람들, 내 생각으론 그들이야말로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밤하늘은 내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싸늘하게 운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 선각자들은 인간적인 욕구를 넘어섰기 때문에 영혼의 동반자 따위가 필요 없었던 것일까?
거문고자리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창백한 직녀성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삶을 누릴지 몰라도 완전한 사람이 되는 일은 나하고는 거리가 멀다.
과연 그들은 우리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엔 영혼의 동반자라는 것은 없으니, 아예 생각을 말라는 것일까?
귀뚜라미들이 풀숲에서 천천히 울었다.
글쎄, 글쎄, 글쎄 …
나는 벽에 부딪쳤다. 어느새 한 쪽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만일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가르쳤다면 - 나는 화가 나 소리쳤다.
그들이 틀린 것이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 영혼의 동반자인 그녀도 나와 생각이 같을까?
미지의 사랑하는 이여! 과연 그들이 옳은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그녀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다시 아침이었다. 비행기 날개에 서렸던 서리가 녹아 한두 방울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 일어나 연장주머니와 식료품 상자, 화로 등을 챙겨 비행기 앞자리에 올려놓고 보자기를 씌워 단단히 묶었다.
벌판에서의 마지막 아침식사를 끝내고 남은 것은 너구리를 위해 풀숲에 놓아두었다.
잠시 눈을 붙이고 나니, 한 가지 대답이 떠올랐다.
깨달음을 얻는 선각자들, 그들이 바라는 게 무엇이든 간에, 그들이 어떤 길을 제시해 줄 수는 있지만 결국 무엇을 할 것인가 결정을 내리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어쨌든 난 혼자 살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장갑을 끼고 프로펠러를 돌렸다. 엔진에 시동을 걸고 조종석에 올라앉았다.
혹시 이제라도 내 영혼의 동반자가 이 들판에 오지나 않을까? 헛된 미련에 끌려 목덜미에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들판은 텅 비어있었다.
내 쌍날개 비행기는 아침의 정적을 깨뜨리며 가볍게 날아올라 동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나는 낯선 공항에 내렸다.
그날로 나는 만 천 달러를 받고 비행기를 팔아넘겼다. 돈은 침낭 속에다 쑤셔 넣었다.
한참동안 프로펠러를 어루만지며 나는 쌍날개 비행기에 대고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격납고를 빠져나왔다.
이제 땅을 딛고 선 나는 집 없는 부자였다. 나는 35억의 영혼들이 사는 이 지구상의 한 거리로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이 순간부터 나는, 옛날에 살았던 선각자들 말로는 결코 존재하지도 않는 한 여인을 찾아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2)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 저절로 보호받고 저절로 길이 열린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 이를테면 돛단배나 비행기, 또는 자기가 추구하는 생각들에 정열을 다 바치면 신비한 마술의 힘이 생겨나 앞길을 열어주고 세상의 여러 규칙이나 논리, 반대 등을 물리쳐 주며 우리에게 단점이나 두려움, 의혹 등을 극복할 용기를 준다. 그런 사랑의 힘이 없다면 … >
“뭘 쓰고 있죠?”
플로리다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 여자가 말을 걸었다. 종이 위에다 연필로 뭔가 쓰고 있는 사람을 생전 처음 보기나 한 것처럼 그녀는 신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엉뚱한 질문을 해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면, 나는 곧잘 무뚝뚝한 대답으로 상대방을 놀라게 해, 입을 다물게 만든다.
“이십 년 전 나에게 편지를 쓰고 있지요. <내가 너만 했을 때 알고 싶었던 것들> 이란 제목으로 … ”
내 무뚝뚝한 대꾸에는 상관없이 그녀는 아주 재미있어 했다. 얼굴이 호기심으로 빛나기 시작했으며 그 호기심을 채우고야 말겠다는 당돌함이 보이기까지 했다. 짙은 갈색 눈에다 잘 빗은 검은 머리가 어깨 위로 흘러 내려와 있었다.
“그 편지 읽어 줄래요?”
당황한 기색도 없이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 때문에 멈춘 마지막 구절을 읽어주었다.
“정말 그럴까요?”
“자신이 사랑했던 걸 한 가지만 말해 봐요. 그냥 좋아한 게 아니라 마음을 몽땅 빼앗겼던 것 한 가지 … ”
“그녀는 얼른 대답했다.
“말이에요. 난 말을 엄청나게 사랑했어요.”
“혹시 말과 한께 있으면 세상이 평상시와 다른 빛깔로 보이지 않았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랬어요. 그럴 때면 내가 마치 여왕이 된 것 같았어요. 엄마가 내 발목을 잡고 안장에서 끌어내리기 전엔 집엘 가려고도 안 했어요. 무섭지 않았냐고요? 천만에요. 덩치가 아주 큰 말이었는데 그 말과 함께 있으면 아무도 날 건드리지 못했어요. 정말이지 말은 내 인생의 전부였어요.”
얘기가 끝났다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이젠 아무 것도 그만큼 사랑하게 될 것 같지가 않아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추억에 잠겼고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 사랑의 힘이 없다면 우리는 권태의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돛단배나 다름이 없다. 유령선처럼 … >
“이십 년 전의 당신한테 그 편질 어떻게 부칠 거예요?”
“아직 모르겠어요.” 문장을 끝마치며 내가 말했다.
“하지만 말야, 막상 시간 속을 되돌아가는 방법을 알았을 때 부칠 편지가 없다면 더 낭패 아니겠어? 그래서 미리 편질 써 놓는 거야. 어떻게 부치는가는 그 다음 문제지.”
얼마나 유감인가. 이런 걸 열 살 때 미처 깨닫지 못하다니 … 이런 말을 나는 내 자신에게 얼마나 자주 했던가.
“어디까지 가죠?” 그녀가 물었다.
“장소를 묻는 거야?”
“그래요.”
“겨울을 피해 남쪽으로. 플로리다쯤.”
“플로리다에선 뭘 하게요?”
“뚜렷한 건 없어. 여자를 만날 생각인데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조차 모르거든.”
이쯤에서 나는 대화를 끝내고 있었다.
“그 여잘 만나게 될 거예요.”
나는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나게 될 거라고?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야?”
“그래요.”
“어디 말해 봐.”
“말할 수 없어요.”
이렇게 대답하면서 그녀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두 눈이 더 없이 깊고 그윽했다. 햇볕에 탄 매끄러운 피부,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만으로는 대체 어떤 여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약간 앳되어 보일 뿐이었다.
“말할 수 없다. 그게 바로 명답이지.” 나 또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버스는 농장들이 줄지어 있는 주의 경계선을 따라 달렸다. 고속도로 부근은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온통 가을 색이었다.
내 쌍날개 비행기라면 저 들판에 부드럽게 착륙할 수 있을 텐데. 곳곳에 전선줄이 둘러 처져 있긴 하지만 내 쌍날개 비행기라면 충분히 내러 앉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낮선 여자는 대체 누구일까? 내 안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불안과 의혹의 구름을 걷히게 해주려고 신이 보낸 우주의 미소일까?
그럴지도 몰라. 어떤 가능성이든 무시할 수 없으니까. 어쩌면 가면을 쓰고 나타난 도날드 시모다일지도 모른다.
“비행기를 조종할 줄 알아?” 나는 슬며시 떠 보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버스를 타고 다니겠어요? 비행기라면 생각만 해도 겁이 나요.” 그녀가 대답했다. 실제로 겁이 나는 듯 몸을 떠는 시늉을 해 보이며,
“갑자기 비행기는 왜죠? 비행기는 딱 질색이에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손지갑을 열었다.
“담배 좀 피워도 괜찮겠죠?”
나는 그만 반사적으로 몸을 움추렸다.
“괜찮으냐고? 담배를? 오, 제발 …” 나는 그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애쓰면서 설명을 했다.
“이 좁은 공간에다 그 지독한 담배 연기를 내뿜을 생각은 아니겠지? 자기한테 아무 짓도 안 한 나를 담배연기로 숨 막히게 하려는 건 아니지?”
그녀가 정말로 도날드 시모다라면 내가 담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 잘 알 텐데. 내 말에 그녀는 당장 표정이 굳어졌다.
“정말 미안해요.” 결국 이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손지갑을 들고 얼른 다른 자리로 가버렸다.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잔뜩 골이 나 있었다.
안 된 일이다. 저리도 그윽한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담배를 피우다니 …
나는 다시 어릴 때의 나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연필을 들었다.
영혼의 동반자를 찾는 일에 대해 뭐라고 써야 좋을까? 연필은 좀처럼 앞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었다.
어릴 때 내가 살던 집엔 야트막한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었다. 그 울타리엔 윤이 나는 흰색 나무 대문이 달려 있었고, 개구멍도 두 개 뚫려 있었다.
달이 높이 떠 있던 어느 날 밤, 학교 무도회에서 밤늦게 돌아 온 나는 그 울타리 앞에 멈춰 서서 나무 대문에 손을 얹고 개에게도 들리지 않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자신과 내가 사랑하게 될 미지의 여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난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이 지구 위 어디엔가 당신이 틀림없이 살아 있으리라고 믿는다. 언젠가는 내가 만지고 있는 이 나무 대문에 당신과 내가 함께 손을 얹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당신의 손이 바로 여기 이 나무 대문에 닿고, 우리는 둘이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 더없이 행복한 날들을 보낼 것이다. 우린 서로가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은 우리가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훗날엔 그런 모든 의문이 저절로 풀리게 될 것이고 찬란히 빛나는 그 무엇인가가 우리를 한데 묶어 놓을 것이다. … 내가 내 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당신에게로 점점 가까이 날 데려갈 것이다. 어서 그 날이 오기를 … 너무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기를!”
어렸을 때의 숱한 일들을 이젠 다 잊어먹었지만 나무 대문과 그 앞에서 내가 했던 말들은 아직도 내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 그녀에 대해 할 말이 뭐가 있는가? 그 시절의 나에게 어떤 말을 들어줄 수가 있단 말인가? 꼬마친구, 너도 알다시피 그로부터 이십 년이나 지났지만 난 여전히 혼자다.
나는 수첩을 내려놓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물론 할 말이 있기는 있다. 변명에 불과하지만 …
“맘에 쏙 든 여자를 찾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리챠드! 게다가 너는 옛날보다도 훨씬 더 까달아 졌어. 생각해 봐. 네가 신봉하는 것들이나 너의 주의주장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우수꽝스러울 뿐이야.”
그렇다. 나는 늘 이렇게 생각해 왔다. 내가 찾는 그 여인은 나와 똑 같은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즉 세상일이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며 우리가 마음먹은 그대로가 현실로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믿음을. 따라서 기적 같이 보이는 일들이 실제로는 전혀 기적이 아니라는 믿음을. 그녀 또한 이 사실을 터득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만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렇다. 그녀는 나와 똑 같아야 한다. 물론 나보다는 훨씬 아름다워야 하겠지. 난 아름다움을 좋아하니까. 그녀는 나와 똑 같은 정열을 갖고 있는 반면에 나와 똑 같은 편견들을 갖고 있어야 한다.
줄담배를 피우고 아무데나 재를 떨구고 다니는 여자와 함께 산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모임에나 쫓아다니고 술을 물마시듯 하는 여자, 비행기나 그 밖의 새로운 어떤 걸 겁내는 여자, 어떤 걸 보고 나는 웃는데 심드렁한 표정만 짓고 있는 여자, 이런 여자는 절대 안 된다.
돈이 있으면 나누어 쓸 줄 모르는 여자, 또 돈이 없을 땐 공상 이라도 함께 누눌 줄 모르는 여자, 너구리를 싫어하는 여자 …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런 여자라면 혼자 사는 게 낫지!
버스가 두 세 시간 계속해서 달리는 동안 나는 수첩 뒷장에다 내가 생각하는 <완전한 여자>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아홉 장도 넘게 쓰고 나서 난 그만 의욕을 잃었다. 내가 쓴 모든 조건이 다 중요했으며 실제로 꼭 들어맞아야 할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 기준에 맞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나 또한 그 기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냉정한 비판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색종이 조각들처럼 정신 못 차리게 쏟아져 내렸다. 다른 누구에게 그 기준을 대보기 전에 나부터가 우선 자격미달이었다.
그러니 계속 써나가 봤자 실망만 늘어났다.
<더 깨인 정신을 가질수록 남의 요구에 맞춰 살아간다는 게 더 어려워진다. 더 많은 걸 터득할수록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단숨에 쓰고 나서 나는 맨 끝에다 얼른 이렇게 토를 달았다. <나 역시도> 그렇다면 내가 설정해 놓은 조건들을 바꾸어야 할까? 아니, 그 조건 중에 잘못된 게 무엇이란 말인가? 줄담배를 피우며 비행기를 싫어하고 마약에 절어 사는 여자라도 괜찮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 순 없다.
내가 앉은 쪽 창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어느새 들판에는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따. 이 어스름 저 편에 비행기도 착륙할 수 없는 작은 밭뙈기들과 구불구불한 논들이 있다는 걸 난 안다.
<어떤 걸 바라면 반드시 그걸 이룰 수 있는 힘도 따라온다.>
아하, 그렇다. 「메시아의 수첩」 -- 그걸 어디다 두었을까? 도날드 시모다가 죽은 날 풀섶에 내던진 것 같다.
그 수첩은 아무데나 알고 싶어 하는 답이 죄다 적혀 있었다. 그래서 한때 난 그걸 마술 책이라 불렀고 시모다는 그런 날 못마땅해 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우리가 찾는 답은 어디에나 적혀 있다. 신문 조각이나 오래된 책, 어디에도 우리가 찾는 해답은 있다. … 눈을 감고 알고 싶어 하는 걸 마음속에 떠올린 다음 글씨가 써있는 곳이면 아무데나 손가락으로 짚어 봐라. 거기에 바로 답이 있다.”
차 안에서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인쇄물은 공교롭게도 내가 도날드 시모다에 대해 쓴 책이었다. 출판사에서 내게 틀린 글자를 바로잡아 보내준 마지막 교정본이었다. 너덜너덜해져 이젠 글씨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한때 난 그 책이 이 세상에서 쉼표로 끝나는 유일한 책이기를 바랬었다.
그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는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하면 사랑스럽고 완전한 나의 연인을 찾을 수 있는가? 이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이고는 책을 펼쳐 손가락으로 한 군데를 짚고 눈을 떴다.
114페이지.
내 손가락은 <실현하다>라는 단어 위에 멈춰 있었다.
<뭔가를 실현하고 싶으면 그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라.>
아하, 그렇다. 이걸 왜 진작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오랫동안 난 이 방법을 써 먹지 않았었다. 그 효력의 대단함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좌석 위에서 비치는 불빛을 받아 거울로 변한 유리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나는 그녀가 이미 거기에 나타났다고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 영혼의 동반자인 그녀를 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건처럼 생김새만 떠올려야 하나? 가령 키는 이 정도 이고 긴 머리에다 바다 빛과 하늘빛으로 조화를 부리는 사랑스러운 눈동자?
아니면 내면적인 면을? 이를 테면 티 없이 맑은 마음과 두려움을 모르는 결단력, 재기 번뜩이는 상상력, 그리고 무수한 생을 거치면서 터득한 놀라운 지혜? 이런 걸 대체 어떻게 그려낸단 말인가.
지금이라면 얼른 그려낼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어려웠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했다. 상상해 낸 모습을 눈앞에 단단히 붙들어 매둬야 하는데도 기껏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면 금방 흩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모습이 내 앞에 있다고 믿으려고 여러 번 애써 보았지만 나타나는 건 단지 내 생각 속에서 왔다, 갔다하는 유령 같은 모습의 그림자들뿐이었다.
상상이라면 자잘한 부분까지 자신이 있는 나인데도 정작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의 모습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그녀가 보인다. 그녀가 저기에 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깨진 거울 저편에서 가물거리고 있는 불빛, 흔들리는 어둠 뿐이었다. 끝내는 포기하고 말았다.
심령의 힘, 그건 도무지 믿을 게 못된다. 막상 써먹으려고 하면 오히려 더 안 되는 게 바로 심령의 힘이다.
긴 여행도 여행이지만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느라 너무 애를 썼기 때문에 나는 그만 기진맥진해 차안에서 잠이 들었다.
그때였다. 문득 우령찬 내면의 목소리 하나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 리차드! 실망하지 말고 잘 듣게!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너의 연인이라? 네 영혼의 동반자 말이지? 넌 이미 그녀를 알고 있어!”
- * -
아침 8시30분,
나는 미국 최남단 풀로리다 중부에서 버스를 내렸다.
우선 배가 고팠다. 침낭 속에서 많은 현금이 들어 있으니 돈 걱정은 안 해도 좋았다. 문제가 되는 건 이제부터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이었다.
따뜻한 플로리다. 정류장엔 영혼의 동반자는커녕 친구도 집도 아무 것도 없었다.
한 카페로 들어가는데 문 옆에, 자기네 가게에선 손님을 내쫓을 권리가 있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누구나 당연히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구태여 그렇게 써 붙여 놓을 필요까지 있는가? 이 가게 주인은 뭔가 겁에 질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겁에 질려 있는가? 깡패들이 들어와 둘러엎을까 봐? 아니면 범죄조직이라도? 이렇게 작은 카페에?
웨이터가 팔짱을 끼고 서서 내 몸꼴과 옆에 꿰찬 침량을 흩어보았다. 내가 입은 블루진 윗도리는 소매 근처가 헤져 실밥이 너덜거렸으며 침량은 비행기 기름때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손님을 내쫓을 적당한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선수를 쳤다.
“잘 됩니까?”
“그럭저럭요.” 하지만 카페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나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커피 드릴까요?”
아침부터 커피를? 그 쓴 물을 … 틀림없이 담뱃재 같은 걸 섞었겠지.
“아니, 우유 한 잔하고 따끈한 보리빵으로.”
한때 나는 아침 식사로 돼지고기 볶음이나 햄버거를 주문하곤 했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 달라졌다.
생명의 불멸성을 믿게 될수록 간접적으로라도 무언가를 죽인다는 건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돼지 한 마리가 내 아침 식탁에 오르기 위해 피를 흘리는 대신 잠깐이나마 명상적인 삶을 살아갈 기회를 갖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육식을 멀리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따끈한 보리빵이 최고였다.
나는 보리빵을 한 조각씩 뜯어먹으며 창밖 시가지를 내다보았다.
이 거리에서 과연 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글쎄, 수십 억 인구 속에서 원하는 한 사람을 찾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어떻게 내가 이미 그녀를 알고 있단 말인가?
세상의 현자들은 곧잘 우리가 한 번도 못 만났다 할지라도 이미 서로를 다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지금, 그런 말은 별로 위안이 못된다.
“어이, 아가씨! 날 기억해? 우리의 의식 세계는 시공간을 초월해 있으며 우리는 이미 하나이기 때문에 잘 생각하면 우리가 오랜 친구라는 게 기억날 거야.”
이렇게 말을 걸면 결과는 뻔하다. 대개의 미혼여성들은 세상에 엉큼한 늑대들이 많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을 걸었다가는 늑대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나는 기억 속을 더듬어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여자들을 한하나 생각해 보았다.
그들 중엔 직장생활을 계속하거나 결혼한 여자도 있고, 아무튼 나와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여자들이었다.
내가 아는 모든 여자에게 새삼스럽게 전화를 건다면 …
“여보세요.” 그녀가 전화를 받는다. “누구세요?”
“리차드 바크.”
“누구라고요?”
“일전에 책방에서 만났었는데 생각 안 나요?” 당신이 책을 읽고 있는데 내가 아주 좋은 책이라고 말했더니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해서 내가 바로 그 책을 쓴 사람이라고 말했었지.“
“아, 당신이군요!”
“별일 없었어요? 결혼생활은 여전하고?”
“그럼요 … ”
“다시 목소릴 들으니 정말 반갑군. 그럼 잘 지내요.”
“아 … 그러죠.”
모든 여자와 이런 식으로 싱겁게 얘기를 끝내는 것보다 더 멋진 방법이 꼭 있을 텐데 … 아무튼 때가 되면 내가 찾는 여자를 만날 것이지만 그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돈을 치르고서 햇빛이 환한 거리로 걸어 나왔다.
무더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밤에는 모기떼들이 극성을 부리겠지.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오늘 밤부터 지붕 아래서 잘 텐데.
그때 식당에서 침량을 놓고 온 것이 생각났다.
땅에는 전혀 다른 삶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물건을 챙겨 비행기의 앞자리에 던져 놓고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이. - 사람들은 물건을 손에 들고 다니거나 지붕을 찾아 그 밑에 놓아둔다. 이제 비행기도 없고 포근한 건초밭 위의 잠자리도 없는 나로써 이 땅 위의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내가 앉았던 자리엔 그새 딴 손님이 와 있었다. 내가 곧장 다가가자 새 손님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실례합니다.” 나는 옆자리에 놓여 있는 침량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이걸 놓고 갔거든요. 끈으로 묶여 있지 않다면 난 영혼까지 내버리고 다녔을 거예요.”
나는 다시 침량을 흔들며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문득 공군에 있을 때 물건을 들고 있는 손은 흔들어 선 안 된다고 배우던 게 생각났다.
군대에서는 동전 하나를 들고 있더라도 그 손을 흔들어 선 안 된다.
유리로 된 전화박스가 눈에 띄자 문득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내 책을 펴낸 출판사는 뉴욕에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무슨 상관이랴. 요금은 그 쪽에서 낼 것이다. 어디나 특별 거래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곡예 비행사는 물건을 사고 돈을 내는 대신 비행기를 태워주며, 출판사에서는 작가들이 거는 전화요금을 대신 부담해 준다.
다이얼을 돌리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편집부 여직원이었다.
“리차드! 그동안 대체 어딜 가 있었어요?“
“글세, 한 마디로 대답하긴 어렵군. 하도 여러 군델 돌아다녀서.” 나는 잠시 생각을 더듬고 나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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